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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복음의 고난 - 다시 불붙는 은혜의 선물을 위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1. 23.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디모데후서 1:6)

바울은 지금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를 향해 조용히 그러나 깊은 울림으로 편지를 써 내려갑니다. 첫 번째 서신이 비교적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내용을 담았다면, 두 번째 서신은 마치 유언과도 같았습니다. 마지막 숨결이 담긴 글처럼, 바울은 가장 본질적인 고백만을 남깁니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고, 사람의 손으로 세워진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보냄을 받은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 되신 예수 안에서 그를 붙들고 보내셨기에, 그의 삶은 처음도 끝도 “복음 하나”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생명 안에 디모데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사랑하는 아들”이라 부르지만, 이는 정서적인 애정 이상의 의미입니다. ‘믿음 안에서 한 몸이 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존재입니다. 그 고백이 디모데를 향해 흘러나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우리를 끌고 가시는 생명의 상태입니다. 바울의 인사는 단순한 문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축복을 “
있을지어다”라고 명령형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원문 그대로라면 이렇게 들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너를 이끌고 있다)

은혜도, 긍휼도, 평강도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믿음이 좋은 날에만 찾아오는 감정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붙들고 끌고 가는 생명의 상태입니다. 마치 강한 물살에 몸이 잠겨 흘러가듯, 복음은 우리를 그분의 생명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바울도 그 흐름 안에 있었고, 디모데도 그 안에 있었으며, 오늘 우리도 그 은혜의 물살 안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
밤낮으로 너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 ‘감사’는 단순히 고마움이 아니라 ‘은혜’(카리스)라는 단어입니다. 어두운 밤이든 밝은 낮이든, 디모데를 떠올릴 때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디모데의 눈물, 수고, 부담, 율법적 자기 의, 사역의 무게 등, 그 모든 것을 기억했지만, 동시에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눈물을 닦으실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의 말씀에도 “
그분이 그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우리의 율법적 땀과 눈물, 스스로 의로운 척 버티던 흔적을 하나님이 지워 주실 때, 비로소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바람은 위로의 말 한마디가 아니라, 디모데의 무거운 눈물이 사라지고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유산이 아닙니다. 믿음이신 분의 임재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언급합니다. 마치 디모데가 훌륭한 신앙 가문에서 ‘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라는 듯 보이지만, 바울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거짓 없는 믿음이 너희 속에 거했다.” 믿음을 ‘물려주었다’가 아니라,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모두 안에 거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믿음은 인간의 가정윤리도, 전통적 경건도, 신앙문화의 계승도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하나로 묶으시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로이스, 유니게, 디모데, 그리고 오늘 우리까지, 모두 하나의 몸, 하나의 믿음, 하나의 집, 하나의 교회가 됩니다. 복음은 혈연보다 강한 언약의 피로 우리를 묶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서신의 중심이 되는 요청을 합니다.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라.” 여기서 ‘
불일 듯 하게 하다’는 단지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감정적 의미가 아니라, ‘하늘에서, 위로부터 다시 불을 붙이신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노력으로 다시 불태워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날마다 하늘로부터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안수를 받을 때 주어진 사명도,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도, 믿음도, 능력도, 열정도, 모두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늘의 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꺼져갑니다. 두려움 때문에, 사람의 눈 때문에, 지치는 열심 때문에. 그래서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다." 즉, “디모데야, 복음을 위해 다시 일어나라. 하지만 네 힘으로가 아니라, 하늘의 불이 다시 붙는 은혜 안에서 일어나라.”

바울의 마지막 서신은 단지 디모데를 위한 권면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초대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열심이 아니라 은혜이며, 결단이 아니라 하늘의 약속이며, 나의 의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불입니다. 우리 안에 꺼져가는 복음의 열정,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 사역의 무게와 눈물, 지쳐버린 믿음의 상태를 하늘의 은혜가 다시 붙잡으시고 불을 붙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
주님, 제 안에 주신 은혜의 선물을 다시 불일 듯 하게 하소서.” 네 힘으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시는 불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