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누가복음 19:11)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25:13)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익숙하게 아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비유들을 이렇게 이해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talent)를 주셨으니, 열심히 활용해서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상급을 받자.” 그러나 이 해석은 비유의 핵심을 완전히 비껴갑니다.
예수님은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가? 잘못된 하나님 나라의 기대를 깨뜨리기 위해서 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1절은 이 비유의 이유를 아주 명확하게 밝힙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당장 다윗의 나라가 회복되고 정치적·물질적 왕국이 세워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착각을 부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앞에서 즉시 펼쳐지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그분이 떠나셨다가 다시 오시는 사이, 이 긴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영적 왕국입니다. 따라서 므나의 비유는 ‘당장 나타날 것’이라고 착각했던 하나님 나라를 바로 잡는 비유입니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 역시 같은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가 끝나며 예수님은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왜 깨어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달란트 비유가 이어집니다. 즉, 두 비유는 모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당장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기다리는 동안 제대로 살아라.”
비유의 핵심은 ‘은사 활용’이 아닙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각자 받은 재능을 잘 개발해서 하나님께 이익을 남겨 드리라”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달란트”와 “므나”는 오늘날의 ‘talent(재능)’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둘 다 그 시대의 화폐 단위입니다. 이 단어가 영어 talent와 같다고 해서, 비유 전체를 ‘재능 개발’로 바꿔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오해입니다.
만일 이 비유가 재능 활용을 뜻한다면,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은? 몸 약하고 아무 재능 없어 보이는 이들은? 은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은? 그들의 천국 상급은 0점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7:7~10). 종은 본래 주인이 시킨 일을 했다고 해서 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천국이 서로 경쟁하여 상급을 다투는 곳이라면, 그곳은 더 이상 천국일 수 없습니다.
그럼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인이 없는 동안’의 삶입니다. 므나 비유에서 주인은 먼 나라로 떠나 왕위를 받아 돌아온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셨다가 다시 오시는 종말의 구조를 나타냅니다. 달란트 비유도 같은 구조입니다. 주인이 없는 사이의 시간, 이것이 오늘 하나님 나라를 사는 우리의 현재입니다.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이 없는 동안 종들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왜 결산이 있는가? 행위 심판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태도”의 심판입니다. 주인이 돌아와 종들을 부릅니다. 각각이 무엇을 했는지를 조사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행위 평가’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비유 전체를 보면, 핵심은 ‘행위 양’이 아닙니다.
종들을 나누는 기준은 이것입니다. 주인을 신뢰했는가, 주인을 오해하여 두려움에 숨겼는가, 주인을 아예 거부했는가(그의 백성들), 첫째 종과 둘째 종은 “주인의 성품”을 알기에, 주인이 맡기신 것을 주인의 뜻에 맞게 사용했습니다. 일의 성과가 굉장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주인이 남긴 뜻을 따라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은 매정하여, 맡기지 않은 것까지 찾으니까 나는 무서웠습니다.” 그는 주인을 자비 없고, 억압적이며, 자기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존재로 오해했습니다. 즉 그는 주인을 믿지 않았습니다. 비유의 심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살아왔는가, 그 믿음이 삶 속에서 어떤 태도로 드러났는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모습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삶의 태도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당장 나타날 무엇으로 기대하지 말라. 그 나라는 보이는 정치적\물질적 왕국이 아니다. 주인이 없는 동안, 그분의 성품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라. 그것이 깨어 있는 삶이다. 마지막 종처럼 하나님을 왜곡된 눈으로 보며 '하나님은 매정하니까, 무섭고 부담스러우니까'라고 생각하며 숨어 살지 말라. 하나님 나라의 최종 심판은 단순한 행위 평가가 아니라, 그분을 어떻게 믿고 살았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이다."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는 ‘재능을 갈고 닦아 더 큰 상급을 받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참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인이 부재한 이 시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주인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이 이 땅에서 드러나기를 삶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가 우리의 하루, 우리의 태도, 우리의 작은 충성 속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두 비유를 통해 드러내신 참된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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