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1~3)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하나님의 사랑은 크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 익숙해져,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집요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고 우리에게 다가왔는지를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그 사랑의 진짜 크기를 알려주기 위해 먼저 인간의 참된 상태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어쩌면 듣기 불편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이지만, 그것을 알아야만 복음의 영광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죽어 있는 자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바울은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단순히 약함이 아닙니다. 스스로 눈을 뜰 수도, 손을 뻗을 수도,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죄 속에서 헤맬 때 우리는 우리가 방황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길을 찾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죽어 있었다.”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이 아니라, 찾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랑할 마음이 아예 없었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생명에 반응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죄는 ‘나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바울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그저 부끄러운 실수나 도덕적 결함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삶”, 즉 하나님을 거부하고 다른 주인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가 저지른 것은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대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선언, 그것이 죄였습니다. 그리고 그 반역의 피가 아담의 후손인 우리 안에 흐릅니다. 우리가 죄를 배우지 않아도 죄를 짓는 이유는 죄가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듯,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떠나는 쪽으로 흘러갑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는 태어날 때부터의 우리의 이름입니다. 바울은 인간을 향해 선언합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이 말은 우리가 악한 본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빠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교육이 부족해서 악해진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하나님을 거역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아기는 죄를 지을 기회도 없는데 죽습니다. 왜일까요? 바울은 말합니다. 그가 이미 아담 안에서 죄의 결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사람은 원래 선하다. 환경만 좋으면 누구나 바르게 자란다.” 그래서 잘못을 ‘분석’해서 고치려 하고, 징계를 악하다고 말하며, 인간의 가능성과 의지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간단하고도 냉정합니다. “선한 것이 내 안에 거하지 않는다.”(롬 7:18) “죄악 중에 출생했다.”(시 51:5) 우리가 선하지 않은 것은 우리 탓도 아니고 부모의 탓도 아니고 환경의 탓도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흙이 아니라 죄라는 늪 속에서 태어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복음은 시작됩니다. 우리가 살아 있어서 하나님께 다가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천국에 데리고 가시기 위해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망가져 있을 때, 아무 희망도 없을 때, 하나님께 반항하며 죽은 채로 누워 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살리고야 말겠다.” 그 사랑은 ‘결정’이 아니라 집념이었고, 그 집념은 ‘감정’이 아니라 능력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것으로 우리를 살리겠다는 의지를 세상 가운데 새겨버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아는 자만이 은혜를 압니다. 우리가 정말로 죽어 있었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나는 전적으로 은혜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가 믿음을 갖게 된 것도, 죄를 보게 된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도, 교회로 걸어 들어온 것도, 회개의 눈물이 터진 것도, 모두 내가 뭔가 잘해서가 아니라 죽어 있던 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 사랑에 사로잡혀 살아갈 뿐입니다.
주님, 저는 죽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찾을 마음도, 선한 것을 선택할 의지도 없던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아들의 희생으로 저를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집념 어린 사랑이 오늘도 저를 붙드시고, 내일도 붙드시며, 마침내 영원한 나라까지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제가 오늘 살아 숨 쉬고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이 순간조차 모두 은혜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신약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도, 신실한 자 - 구별된 백성의 영광 (0) | 2025.11.20 |
|---|---|
|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 -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의 자리 (0) | 2025.11.20 |
| 산상수훈 -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얻는 땅 (0) | 2025.11.19 |
|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 ‘나’와 ‘그리스도’의 신비한 교차점 (0) | 2025.11.15 |
| 평강 -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오는 선물 (1) | 2025.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