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5)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부드럽고 순한 사람은 복을 받아 땅까지 얻는다.” 얼마나 마음 편하고 이해하기 쉬운 해석입니까. 마치 착하게 살면 좋은 일 생기고, 온화한 태도를 가지면 하나님이 땅을 선물로 준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어떤가요? 온유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땅은커녕 외롭고 가난하며, 억눌릴 때가 더 많습니다. 세상에서 땅을 얻는 사람들은 대부분 ‘온유’와는 거리가 멉니다. 부드럽고 따스한 태도만으로는 어떤 자리도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 ‘온유하면 땅을 얻는다’는 뜻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성격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전에서 만나는 온유의 정의는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성격이나 기질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세를 이 땅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민 12:3). 하지만 성경의 묘사를 떠올려 보십시오. 욱하는 성질을 이기지 못해 애굽 사람을 처 죽였고, 진노하여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렸으며, 반석을 두드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적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의 모습일까요? 그럼에도 성경은 모세를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자”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다른 차원의 온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온유는 ‘낮아진 자리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앞의 태도’입니다 본문에 쓰인 헬라어 프라우스는 ‘가난한, 억눌린, 낮은, 애통하는’이라는 뜻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아나브 역시 가난, 고통, 억눌림, 비천이라는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온유란 부드러운 성격이 아니라 고난과 낮아짐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취하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논리적으로 연결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의 빈곤함을 본 자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그 가난함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울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온유한 자는 그 애통함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서는 태도를 가진 자입니다. 온유는 바로 이러한 영적 흐름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마 11:29). 여기서도 같은 단어인 ‘프라우스’가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무슨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며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멍에’란 결국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가 어떻게 쉽고 가볍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온유의 본질입니다. 온유란 고난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고난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알고 기꺼이 감당하는 능력입니다. 억눌린 자리, 낮아진 자리, 고통의 자리에 있을 때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밀려 가는 존재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온유’ 선언은 스가랴 9장의 예언을 직접 인용하신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왕이 멍에 매는 나귀, 즉 ‘주인에게 붙들린 존재’를 타고 시온으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 왕이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약의 피를 성취하기 위해서”(슥 9:11). 즉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낮아지고 억눌리며 고난의 길을 가는 존재”로 정의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온유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얻는 ‘땅’은 무엇인가? 세상에서 말하는 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조차 ‘가나안 땅’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온유한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은 무엇일까요? 그 땅은 새 창조의 땅,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영원한 기업, 곧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 나라의 몫입니다.
온유한 자는 자기 힘과 자기 의지로 땅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억압받고, 낮아지고,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붙들린 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새 창조의 기업을 약속하십니다. 온유는 땅을 ‘얻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받을 자격’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첫째, 나는 지금 고난과 낮아짐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고난이 있을 때 우리는 보통 불평하거나, 스스로 해결하려 들거나, 아니면 도망갑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순종합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자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는 억눌림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는가?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고난을 피해서 온유해진 것이 아니라, 언약 때문에 고난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초청이 있습니다. 억눌린 자리에 있을 때, 낮아진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그 자리를 견디고 버티는 것, 그게 온유입니다.
온유란 하나님이 나를 이끄시는 길에 자신을 맡기는 힘입니다. 온유한 자는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붙들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새 창조의 땅,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기업을 받습니다.
세상은 온유한 자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복이 있는 자여! 너희는 온유한 자다. 너희가 땅인 내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이 약속이 오늘 우리의 가슴에 새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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