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요한계시록 8:7~12)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요한계시록 8장의 이 장면을 처음 읽는 사람은 대개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입니다. 머릿속에 할리우드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거나, 아니면 너무 난해해서 그냥 덮어버리거나, 그러나 이 본문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생각보다 훨씬 우리 일상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화산 폭발이나 소행성 충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고학자들이 이스라엘 고대 유적지를 발굴하다 보면 종종 나란히 붙어 있는 두 개의 제단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 그 바로 곁에 세워진 또 하나는 가나안의 풍요 신 바알을 위한 것입니다.
얼핏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왜 옆에 다른 신의 제단을 세웁니까. 그런데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아주 인간적인 솔직함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항상 주시지는 않습니다. 올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아이를 갖고 싶은데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안 주시는 것은 바알에게라도 빌어서 받아내야겠다는 계산, 그것이 두 번째 제단의 정직한 이유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곁에 다른 것을 세워두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버렸다." 이 말이 처음에는 다소 가혹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필요한 것이 생기면 다른 여자를 찾아간다면, 아내는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당신은 나를 버렸어요." 전부를 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개의 제단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당신이 가장 열심히 기도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취업이었습니까. 사업의 회복이었습니까. 자녀의 합격이었습니까. 아니면 병의 치유였습니까.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결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을 통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였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빨리 이것 좀 해결해 주세요"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들은 세상에서 찾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채워지지 않으면 쇼핑으로, 술 한 잔으로, 스마트폰 화면으로 그 빈자리를 메웁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부족하면 성취감으로, 사람들의 인정으로, 소셜미디어의 좋아요로 보충하려 합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도 여전히 두 개의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팔 재앙으로 돌아가봅시다. 그런데 이 재앙을 읽기 전에 먼저 이 책이 어떤 책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 죽어가던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공포 영화 대본이 아니라, 위로의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시무시한 재앙들이 그 편지 안에 들어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재앙은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것은 동시에 배려입니다. 마치 부모가 아이의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 위해 때로 불편함을 허락하듯,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잘못된 것에 목숨을 걸지 않도록 그것을 흔드십니다.
첫째 나팔,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땅을 태웁니다. 수확을 약속하던 들판이 재가 됩니다. 기근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애굽에 내린 재앙과 같은 패턴입니다. 풍요를 약속하던 땅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성실하게 사업을 일궈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계약이 취소되고 거래처가 끊기고 빚만 남았습니다. 그는 교회 장로였지만, 그 순간까지 자신이 하나님보다 사업을 더 의지하고 살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기근의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그는 처음으로 진짜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가난과 결핍이 성도의 삶에 찾아올 때, 그것은 실패의 증거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영원하지 않은 것에 목숨 걸지 말라고 보내시는 배려일 수 있습니다.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가난한 자가 아니라, 넘치는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인 것입니다.
둘째 나팔, 불붙는 큰 산이 바다에 던져지고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됩니다. 이 '불붙는 큰 산'을 예레미야는 '멸망의 산'이라 불렀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에는 지그라트라는 거대한 피라미드형 신전이 있었습니다. 산처럼 우뚝 솟아있었고, 그 꼭대기에서는 늘 제물의 불이 타올랐습니다. 세상의 풍요를 약속하는 우상의 신전이었습니다.
계시록 18장에는 그 바벨론이 무너지는 날의 장면이 나옵니다. 바다 위에서 바벨론과 교역하며 부를 쌓던 상인들이 멀리서 연기가 치솟는 것을 바라보며 울부짖습니다. "아, 이 큰 성이여. 그 모든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영원할 것 같았던 풍요가 한순간에 재가 되는 것을 목격하며 그들이 흘리는 눈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도 이런 장면을 미리 경험하게 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주식 시장의 붕괴로, 어떤 이에게는 평생 쌓아온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으로, 어떤 이에게는 오랫동안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 때 우리가 "결국 이 땅의 것들은 이런 것이구나"라고 깨닫고 시선을 돌릴 수 있다면, 그 고통스러운 경험조차 화가 아니라 복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나팔, 쑥이라는 이름의 별이 떨어져 물을 독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예레미야는 바알을 섬기던 자들, 세상의 것을 약속하던 거짓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쑥을 먹이실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달콤한 것을 약속했지만 결국 쓴 것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항상 달콤하게 시작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 돈이든, 권력이든, 인정이든, 쾌락이든, 처음에는 빛나는 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별은 결국 떨어지는 별입니다. 이사야는 하늘까지 올라가겠다 호언장담하던 바벨론 왕이 결국 땅 깊은 구덩이에 처박히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 약속된 달콤함을 붙들고 있으면, 그 별이 떨어질 때 우리도 함께 그 쑥을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나팔, 해와 달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집니다. 이것은 문자적인 천문 현상이 아닙니다. 아모스와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해가 대낮에 지고 빛이 사라진다고 예언했습니다. 이 빛은 우리가 붙들고 사는 세상의 질서, 물질적 기반, 눈에 보이는 안전망을 상징합니다. 그것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하나님 대신 세상의 것들을 신뢰하며 사는 삶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는 한 포르투갈 선교사가 등장합니다. 17세기 일본, 기독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절, 그는 숨어서 성도들을 돌보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당신의 이름 때문에 피를 흘려야 합니까. 제발 이 핍박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성도들은 계속 죽어가고,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결국 그 선교사는 신앙을 버리고 일본 정부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엔도 슈사쿠는 그 선교사를 변호합니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침묵을 지킨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전부입니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 침묵은 정말 무관심입니까.
스가랴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불은 금속을 녹이지 않습니다. 불순물을 태웁니다. 금이 불 속에 들어가는 것은 금을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라, 금이 아닌 것들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은 우리를 버리신다는 신호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금이 아닌 것들, 하나님 아닌 것에 붙어 있는 우리의 마음을 정제하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것을 믿을 수 있다면, 그 고통의 시간을 다른 눈으로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읽고 "맞아, 나도 바뀌어야겠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말없이 책상 앞에 앉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해야지, 해야지'를 반복하다가 결국 라면을 끓여 먹고 잠듭니다. 신앙도 정확히 그렇습니다. 결심이 아니라 행동이고, 감동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분별하고 결정하고, 그 결정을 지켜내는 충성과 인내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우리가 어디에 돈을 쓰고 어디에 시간을 쓰는지가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보물로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교회에서의 신앙 고백과 일상에서의 지갑과 달력, 이 두 가지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한번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지난 한 달 동안 어디에 돈을 썼는지, 어디에 시간을 썼는지를 종이 위에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정말 성도인가. 이것은 정죄가 아니라 점검입니다. 좋은 의사는 먼저 진단을 정확히 해야 처방을 제대로 내릴 수 있습니다.
계시록 18장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것은 설교자의 권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안락함, 보장, 풍요로부터 마음을 떼어내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주시지 못하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빠르고 더 확실하게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 목소리는 광고판에서, 소셜미디어에서, 주변 사람들의 성공 이야기에서 쉼 없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두 번째 제단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 불탄 산이 되어 바다에 던져질 것들입니다. 지금은 빛나는 별처럼 보여도 결국 떨어지는 별입니다. 지금은 단단해 보여도 일시간에 재가 되는 풍요입니다. 그것들이 불탈 때 함께 타지 않으려면, 지금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진정한 부자는 많이 가진 자가 아닙니다. 지금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금 이 자리가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 그 사람이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부를 가진 자입니다. 현자는 모든 자에게 배우는 사람이요, 강자는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요, 부자는 자족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자족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옵니다.
세상의 시작이 있었듯 반드시 세상의 끝이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잠시임을 매순간 기억하는 사람만이 올바른 곳에 보물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올바른 곳에 보물을 쌓는 것은 생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거기서 나오십시오. 그 목소리는 오늘도 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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