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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나팔 소리가 전하는 위로 - 누구와의 전투인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12.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요한계시록 8:6~9)

왜 구원받았는데도 힘들까요? 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어느 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고 평안하다고 하잖아.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들지? 믿기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이 솔직한 고백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속 깊이 품고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구원받았다는데, 왜 여전히 힘든 일들이 생기는 걸까요? 왜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하는 걸까요?

요한계시록 8장의 나팔 재앙 이야기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놀라운 답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우박과 불이 피에 섞여 땅에 떨어집니다. 두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불타는 큰 산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집니다. 언뜻 보면 무시무시한 재앙의 연속 같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앞선 7장에서 우리는 중요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한 천사가 금향로에 성도들의 기도와 향을 담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향로에 불을 담아 땅에 쏟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땅에 쏟아지는 환난과 고난은 사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의 응답이라고 하면 문제가 술술 풀리고, 원하는 것을 얻게 되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답은 때로 정반대로 보입니다. 더 힘든 상황, 더 큰 도전, 예상치 못한 시련이 찾아옵니다. 이것이 어떻게 기도의 응답일 수 있을까요?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느냐에 있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거룩함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편안함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은 안락한 환경이 아니라 도전과 싸움을 통해 빚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팔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울려 퍼지는 신호였습니다.

군대를 소집할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여리고 성벽 앞에서 일곱 제사장이 일곱 양각나팔을 들고 섰던 것처럼, 나팔 소리는 전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 나팔 소리와 함께 철옹성 여리고가 무너졌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나팔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의 완전한 소멸을 향한 하나님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팔은 기쁨의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절기와 명절에, 제사를 드릴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의 표현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나팔 재앙도 결국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영원히 예배하게 될 그 날을 향한 나팔입니다.

왕이 등극할 때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때 사람들은 양각을 불며 "솔로몬 왕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래서 일곱 번째 나팔이 울릴 때 우리는 이런 선포를 듣게 됩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새해 첫날에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모든 어두운 것, 묵은 것이 물러가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나팔 재앙은 새로운 창조의 완성을 향한 나팔입니다.

회개를 촉구할 때도, 임박한 심판을 경고할 때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요엘서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경우를 종합해보면 명확해집니다. 나팔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신호입니다. 우리 인생에 닥치는 환난과 고난은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동시에 하나님 백성에 대한 사랑의 경고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악한 세력과의 싸움으로 부르시고, 그 싸움을 통해 우리의 거룩을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배려입니다.

일곱 재앙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재앙들이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려졌던 열 가지 재앙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나팔 재앙인 우박은 애굽의 일곱 번째 재앙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나팔로 물이 피가 되고 쑥이 되는 것은 나일강이 피가 되었던 첫 번째 재앙과 광야의 쓴 물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네 번째 나팔로 해와 달과 별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는 것은 애굽의 아홉 번째 흑암 재앙이고, 다섯 번째 나팔의 황충 재앙은 여덟 번째 메뚜기 재앙입니다.

요한은 왜 굳이 출애굽 재앙을 인용했을까요? 출애굽의 재앙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을 상징하는 애굽의 바로와 전쟁을 선포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건져내신 사건이었습니다.

신명기 4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핵심은 '알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앎을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우리에게 내리는 모든 환난과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확실하게 알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애굽의 장남들을 다 죽이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아홉 가지 재앙을 차례로 겪게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하신지를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천지의 주관자십니다. 그 누구도 그분 앞에 적으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과 싸우신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악이 하나님의 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두 팔 걷어붙이고 힘겹게 싸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승리자십니다. 그분께 패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지금 싸우고 계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악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악의 요소들을 제거해 나가시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순결함, 순전함, 거룩함을 만들어 내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함께 싸우자고 초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싸움, 세상과의 경쟁, 비신자들보다 더 성공해서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이해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이미 유다 안에 마귀가 들어갔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그 마귀의 발을 닦아주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세상보다 더 잘 되어서 세상 사람을 발 밑에 깔고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와 같은 거룩한 자로 만들어지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원수의 발도 씻길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전쟁입니다.

청교도 목사였던 리차드 백스터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들의 삶 속에 거룩을 향한 싸움이 없다면 당신들은 다 가짜다." 강한 말이지만 진실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이 싸움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노예 출신 오합지졸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기로 된 무기와 철 병거를 가진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애굽은 지리학적으로 성이 필요 없는 나라였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 와서야 성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막강한 성을 공략할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은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니까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고 하시면서 전쟁 준비를 시키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실까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고 무기를 만들어라"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전혀 달랐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율법 책을 묵상하라." 여기서 율법은 토라, 즉 모세오경을 가리킵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여호수아서 앞의 모든 성경을 묵상하고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쟁입니다. 대적을 박살내기 위해 실력과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의 발을 씻길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따라 살도록 힘써 행하는 전쟁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정말 강한 존재입니다. 가나안의 거인들, 철 병거를 가진 군사들처럼 강한 존재입니다. 성벽 위로 마차 두 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의 철옹성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그 앞에 서면 마치 메뚜기 같습니다. 그러나 그 대적은 하나님이 맡으십니다.

여리고 성에 왜 망치질 한 번 못하게 하셨을까요? 수십만의 미디안 군사 앞에 모인 삼만 이천 명의 이스라엘 군사들을 왜 다 흩으시고 기드온과 삼백 명만 남기셨을까요? 그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게 되는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갑니다. 이 일곱 재앙들은 전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결국 승리하실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역설을 발견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의 상징은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은 안식의 땅입니다. 그런데 왜 안식의 상징인 가나안에 계속해서 전쟁이 있을까요? 가나안 땅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전쟁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얻어가게 만드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그분이 허락하신 구원과 안식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땅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확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통해서 갖게 만드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경험하고 누리는 것은 싸움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점점 확실하게 알아가게 되고, 그분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천국을 조금씩 조금씩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아, 나에게 주어진 천국의 안식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한 천국의 안식을 이 땅에서 직접 체험하고 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은 거룩을 향한 전쟁을 열심히 치러 내셨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더욱 많이, 더욱 깊이 맛보고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쟁을 겪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기쁘지 않고, 감격스럽지도 않고, 평안이 없는 걸까요?

홍해를 건너긴 건넜는데, 자기 안에 있는 대적들과의 싸움을 하지 않고 매일 그 적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가나안은 우리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싸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마치고 쉬신 것과 같이, 그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을 씁시다."

'힘을 씁시다'라는 표현에 주목해보십시오. 안식에 들어가는데 힘을 쓴다니, 이것도 역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본질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이미 안식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이미 안식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 속에서 안식을 향한 싸움을 반드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힘써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전투를 매일매일 치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구원은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평면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역동적입니다. 다이내믹이 있습니다. 구원은 역사성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한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신분적이며 운명적이며 영적인 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영원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존적 삶에서는 지금 구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거룩해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마치 이미 결혼했지만 배우자를 날마다 더 알아가고 사랑을 깊게 해가는 것처럼, 우리도 이미 구원받았지만 그 구원의 의미를 날마다 더 깊이 경험하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일곱 재앙은 이렇게 구원을 받아 가는, 거룩해져 가는, 성숙을 향해 열심히 전투를 해야 하는 우리의 신앙 여정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우리를 연단하고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를 상상해보십시오. 로마 제국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았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산 채로 불에 태워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요한계시록의 일곱 재앙 이야기를 읽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들은 가슴 벅차했습니다. 왜일까요? 이 재앙의 이야기가 단순히 미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이 고통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과정이구나.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구나. 이 싸움의 끝에는 영원한 승리가 있구나.' 이런 깨달음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까요.

그 감격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난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거룩한 자로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힘들어도 참으라는 거야?" 아닙니다. 그냥 참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점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을 단순히 '왜 나한테 이런 일이'라는 시각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빚어가시려는가'라는 시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세상과의 경쟁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성공하고, 더 부유해지고, 더 유명해지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거룩을 향한 싸움입니다. 어제보다 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예수님처럼 원수의 발도 씻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싸우십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싸우시고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신 분도, 삼백 명의 기드온 군대로 수십만 미디안 군사를 물리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맙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힘써 싸웁시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순종하며 싸웁시다. 그 싸움의 끝에는 영원한 안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는 그 안식을 지금 여기서, 싸우는 가운데서도 맛볼 수 있습니다.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것은 심판의 나팔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나팔입니다. 전쟁의 나팔이지만, 동시에 승리의 나팔입니다. 그 나팔 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우리는 거룩을 향한 아름다운 싸움을 싸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