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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내 삶에 나타나는 요한계시록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30.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요한계시록 6:12~17)

요한계시록은 흔히 두려운 책으로 오해됩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피처럼 변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땅과 바다가 흔들리는 장면들은 마치 언젠가 닥칠 공포스러운 미래만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계시록을
“훗날 일어날 일”로만 밀어두고, 지금의 삶과는 무관한 책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런 식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은 미래의 시간표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지옥에 가지 않는 티켓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타락하여 더럽고 추악해진 상태에서, 그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고 새롭게 회복시키시는 전 과정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 원리는 인간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저주 아래 놓인 자연과 우주 역시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질서는 무너지고, 파괴는 가속화되며, 세상은 점점 불안정해집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연이 아니라 타락의 필연적 결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서든 우주에서든 첫 창조에 속한 더러운 것들을 하나씩 소멸시키십니다. 버려질 것이 버려질 때, 비로소 새것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여섯째 인이 떼어질 때, 우주의 질서가 붕괴됩니다. 해가 검어지고, 달은 피처럼 변하며, 별들은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떨어지고 하늘은 두루마리처럼 말려 올라가며 산과 섬이 제자리를 잃습니다. 이 장면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려는 시도는 계시록의 본질을 놓치게 만듭니다.

성경은 이미 이와 유사한 표현들을 여러 선지서를 통해 반복해 사용해 왔습니다. 바벨론의 심판, 애굽의 심판, 열국의 멸망,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언할 때도 동일한 우주적 붕괴의 언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원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실 때, 우리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믿던 것들이 무너집니다.

성경은 최후의 종말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고 개인의 삶 속에서 반복되는
‘작은 종말들’을 함께 말합니다. 세상은 이 작은 종말들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다릅니다. 같은 사건을 겪지만, 그 사건을 통해 돌이키고, 회개하고, 거룩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흔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기 위해 흔드십니다.

궁극적인 종말은 이미 한 번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죄가 완전히 처리된 은혜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어야 할 지옥의 고통을 한 분에게 모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고통을 단번에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그때, 그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삶은, 그 십자가의 내용을
‘경험적으로 살아내는 과정’입니다.

깊은 화상을 입은 환자의 치료 과정은 잔인할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의사는 마취도 없이 타버린 살을 긁어냅니다. 피가 나야 새살이 돋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의사의 손을 붙잡아 묶어 버리면, 그 환자는 평생 일그러진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심하면 생명까지 잃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타락의 흔적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그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환난과 고난이라는 메스를 사용하십니다. 아픕니다. 날카롭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리기 위한 고통인 것입니다.

우리는 착각하며 삽니다. 해와 달과 별처럼, 건강과 재물과 안정과 지위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들을 흔드십니다.
“이것이 네 영원한 소망이냐?” “이것이 네가 의지하던 반석이냐?” 그 모든 것은 언젠가 다 불타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미리 알게 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참 성도는 고난 앞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아, 나는 진짜구나.”

여섯째 인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이 진노를 능히 감당하겠느냐?” 답은 분명합니다. 아무도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7장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인이 찍힙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그 차이는 실력의 차이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은혜의 차이입니다.

비전은 종종 오늘을 회피하는 핑계가 됩니다. 교회는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단순합니다.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여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거룩을 챙겨야 합니다.

타이타닉 호는
“침몰하지 않는 배”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첫 항해에서 침몰했습니다. 조선술은 앞서 있었지만, 재료는 아직 비스킷 같은 철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같습니다. 외형과 규모가 아니라, 내적 강도가 문제입니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해도, 달도, 별도, 바다도, 땅도 사라집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들뿐입니다. 그러니 불탈 것들에 인생을 소비하지 말고, 영원한 것에 삶을 투자하십시오. 그 과정에서 작은 종말이 찾아올 때,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당신 안에서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