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 하나를 떼시는지라”(요한계시록 6:1)
요한계시록을 읽다 보면 전쟁, 기근, 죽음, 전염병 등의 이야기에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도대체 이 책의 어디가 위로이고 소망일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무서운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이 처음 전해졌던 사람들은,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두려운 시대를 살고 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묻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이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 “우리가 믿는 길이 정말 맞는 건가?”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 질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응원의 편지였습니다.
재앙의 정체는 하나님이 때리시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어린양 예수님이 인을 하나씩 떼십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말들이 등장합니다. 붉은 말은 전쟁, 검은 말은 기근, 청황색 말은 죽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오해합니다. “아, 하나님이 전쟁과 기근과 질병을 내려서 세상을 벌하시는구나.”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누가 일으킵니까? 기근을 누가 만들어 냅니까? 모두 타락한 인간의 욕심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나라에서는 매년 수천 톤의 곡식이 버려집니다. 가격 유지를 위해 바다에 곡물을 쏟아붓습니다. 그 시간에도 다른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굶어 죽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생긴 기근이 아닙니다. 나누지 않으려는 욕심이 만든 기근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재앙은 하나님이 갑자기 악해지셔서 세상을 때리시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죄로 기울어진 세상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위에 어린양 예수님이 인을 떼고 계십니다. 이 말은 곧, “통제되지 않은 재앙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붉은 말은 화평을 빼앗습니다. 서로 죽이게 만듭니다. 우리는 전쟁을 뉴스로 봅니다. 국가와 국가의 전쟁, 종교 전쟁, 이념 전쟁 등 다양한 전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뉴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 안에도 전쟁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교회 안에도 전쟁이 있습니다. 세상은 전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겨야 산다.” “졌으면 끝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이 말씀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이 들어오면 반드시 충돌이 일어난다는 선언입니다. 그 충돌 속에서 세상 사람은 더 강해지려 하고, 그리스도인은 더 죽어갑니다. 전쟁은 성도를 망가뜨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배우는 교실인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할 때, 나는 비로소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검은 말은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밀 한 되가 하루 품삯입니다. 먹고는 살지만, 만족은 없습니다. 가진 것은 늘어났는데 마음은 더 가난해졌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 “조금만 더 벌면 만족할 수 있어.”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부유했던 록펠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만 더.” 이것이 영적 기근입니다. 배는 부른데 마음은 굶주린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기근 속에서 다른 종류의 풍요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시다.” “그분이 계시면 나는 이미 부자다.” 그래서 성도는 잃어도 무너지지 않고, 적어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청황색 말의 이름은 ‘사망’입니다. 칼, 기근, 전염병, 짐승이 따라옵니다. 이 죽음은 단지 육체의 죽음만이 아닙니다. 관계의 죽음, 의미의 죽음, 희망의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나요?”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세요?”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그 인을 떼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 모든 혼란의 중심에 어린양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무력한 관람자가 아닙니다. 역사를 놓치지 않는 주인이십니다.
첫 번째 인에서 등장하는 흰 말은 예수님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아닙니다.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화려합니다. 그러나 그 면류관은 진짜 왕관이 아닙니다. 그 승리는 잠시입니다. 세상은 늘 말합니다. “이 길이 맞아.” “이게 성공이야.” 그러나 결국 그 길의 끝은 전쟁과 기근과 죽음입니다. 성도는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늘 지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지는 삶이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위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말합니다. “너희가 가는 길이 맞다.” “너희의 고난은 헛되지 않다.” “너희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세상이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어린양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성도의 목표는 거룩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반드시 죽고 다시 사는 길인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죽이려 하면 죽으십시오. 그러나 그 죽음은 부활을 전제한 죽음입니다. 지는 것 같지만 이기는 삶, 버리는 것 같지만 얻는 삶, 죽는 것 같지만 사는 삶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인을 떼고 계신 분은 지금도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끝까지 데리고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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