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서 하나를 떼시는지라 내가 또 들으니 네 생물 중 하나가 우레 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6:1,11)
비 오는 날,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지 못하고 길 위에 서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우산을 들고 있었고, 어떤 이는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으며, 어떤 이는 그대로 비를 맞았습니다. 비는 모두에게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비를 맞는 방식과, 그 비를 해석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다 보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인 나에게도 재앙이 임하는가?” 왜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자연재해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가리지 않을까? 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봉을 떼시는데,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평안이 아니라 재앙인걸까? 우리는 흔히 복음을 “안전한 피난처”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폭풍은 피해 가고, 고난은 비켜 가며, 인생은 점점 부드러워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 줍니다. 어린 양이 인을 떼실수록, 세상은 더 흔들리고 더 무너집니다.
재앙은 우연이 아니라, 통제된 사건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보다 누가 그것을 여는가입니다. 그 재앙의 문을 여는 분은 적그리스도도, 혼돈도, 운명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 분명히 붙들면 관점이 바뀝니다.
우리 인생에 닥치는 전쟁 같은 사건, 기근 같은 결핍, 질병 같은 무력함은 “하나님이 자리를 비우신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전히 왕좌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마치 외과의사가 메스를 들고 환자 앞에 서 있는 장면과 같습니다. 칼은 무섭습니다. 그러나 그 칼을 드는 손이 사랑과 목적을 가진 손이라면, 그 칼은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골짜기”를 구원의 자리로 묘사합니다. 축복의 산과 저주의 산 사이,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의 골짜기, 왜 하필 골짜기입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이끄실까요? 산 위에서는 자신이 보입니다. 내 공로, 내 의, 내 신앙 연륜, 내 헌신이 보입니다. 그러나 골짜기에서는 그것들이 하나씩 무너집니다.
거기서는 내가 붙들고 있던 모든 안전장치가 무력해집니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 사람은 자존심을 내려놓습니다. 회사의 구조조정 명단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인생의 설계를 다시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이 골짜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약한 존재였구나.”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구원은 시작됩니다.
재앙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재앙이지만, 그것을 맞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재앙은 경고입니다. “네가 붙들고 있는 세상은 이렇게 쉽게 무너진다.” 믿는 자에게 재앙은 정결케 하는 불입니다. “네가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고, 나를 붙들어라.” 금속을 정련할 때, 불은 피할 수 없습니다. 불이 없으면 찌꺼기는 남고, 순금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삶에 임하는 고난과 재앙은 우리 안에 깊이 박힌 옛 성품, 집착, 통제 욕망을 태워 없애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재앙에서 즉시 건져내지 않으시고, 재앙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십니다. 노아를 홍수 전에 데려가신 것이 아니라,
홍수 한가운데에서 방주 안에 두신 것처럼 말입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우리는 재앙 앞에서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나 성경은 질문의 방향을 바꿉니다. “왜 네가 이것 없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망치기 위해 재앙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단단히 붙들고 있던 ‘망가질 것들’을 놓게 하시기 위해 흔드십니다. 집, 건강, 명예, 관계, 계획, 심지어 신앙의 자부심까지도 모두 물에 잠기고 불타버릴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 이제는 정말 당신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이 역설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죽어야 삽니다. 잃어야 얻습니다. 비워야 채워지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옛 세대는 죽고, 새 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다윗은 왕좌에서가 아니라, 밧세바 사건 이후의 통회 속에서 진짜 다윗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가져본 후에야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재앙과 고난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방식인 것입니다.
혹시 지금 당신의 인생이 흔들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그토록 의지하던 것이 무너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질문을 조용히 해 보십시오. “하나님, 이 재앙을 통해 무엇을 내려놓게 하시려는 겁니까?” “무엇을 더 붙들게 하시려는 겁니까?” 요한계시록의 재앙은 공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린 양이 인을 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손에 의해 흔들리는 모든 것은 결국 우리를 살리기 위한 흔들림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는 죽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자리는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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