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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우리는 극복할 것이다 - 침묵으로 시작되는 완성의 시간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5.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요한계시록 8:1~5)

요한계시록을 읽다 보면 우리는 종종 숨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인(印)이 떼어질수록, 나팔이 불릴수록, 재앙의 강도는 점점 거세지고, 세상은 마치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섯 번째 인, 여섯 번째 나팔까지 따라온 성도라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에 도달합니다.
“이제 그다음은 무엇인가?” “이 모든 심판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여섯 번째 인의 마지막에서 요한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같이 큰 진노의 날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리고 7장에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미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 곧 안전하게 보호받는 교회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일곱 번째 인에서는 무엇이 나와야 하는가? 당연히 악의 완전한 소멸, 하나님 나라의 완성,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 승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기록한 것은 의외로 짧고 조용합니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계 8:1) 폭발도 없고, 재앙의 묘사도 없습니다. 오히려 고요입니다. 이 짧은 침묵 속에 요한계시록의 가장 깊은 종말론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잠잠함”은 종종 심판의 결과이자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의 무력함을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판결이 선포될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이다.”(시 76:8) 애굽의 병거와 말이 홍해에 수장되던 그 순간, 세상은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모든 교만한 소음은 사라집니다.

요한계시록 후반부에서도 동일한 장면이 반복됩니다. 바벨론이 완전히 무너질 때, 그 성 안에서는 더 이상 노랫소리도, 맷돌 소리도, 신랑과 신부의 음성도 들리지 않습니다(계 18장). 세상이 즐기던 모든 소란과 쾌락은 완전히 멈춥니다. 이 침묵은 공포의 침묵이면서 동시에 종말의 확정입니다. 더 이상 반역도, 저항도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침묵을
“반시 동안”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종말의 때를 가리킬 때 쓰는 호라가 아니라, 그 절반을 의미하는 헤미오리온입니다. 이는 단순한 시간 계산이 아닙니다. 요한은 이 표현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시간이 이미 시작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완성뿐이다.”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시작되기 직전과 같습니다.
연주 전, 무대 위에서는 수많은 악기들이 각자의 음을 점검하며 혼란스러운 소음을 냅니다. 그러나 지휘자가 단상에 오르는 순간, 모든 소리가 멈춥니다. 그 짧은 정적은 실패의 정적이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연주가 시작되기 직전의 고요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반시 동안의 침묵”은 바로 그 순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찬란한 찬송이 울려 퍼지기 직전의 숨 고르기인 것입니다.

침묵이 끝나자 요한은 새로운 장면을 봅니다. 일곱 천사가 나팔을 들고 서 있고, 또 다른 천사가 금향로를 들고 제단 앞에 섭니다. 이 천사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의 향로 안에는
“성도들의 모든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완벽한 기도만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뒤엉킨 욕망, 이기적인 소원, 서투른 탄식까지도 모두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그대로 하나님께 전달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그 위에 덮입니다. 악취 나는 기도가 향기로운 향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무엇이 일어납니까? 향로에 하나님의 불이 담겨 땅에 쏟아지자 번개와 천둥과 지진이 일어납니다. 이 땅의 재앙들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세상에게는 심판이지만, 성도에게는 회개와 성숙을 향한 나팔 소리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끊임없이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가?” 요한은 계시록 8장을 통해 분명히 말합니다. 듣고 계실 뿐 아니라, 가장 선한 방식으로 응답하고 계십니다. 병이 낫지 않는 기도도 응답입니다. 고난이 길어지는 기도도 응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우리를 더 깊이 빚어 가는 것도 응답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재앙 앞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시다. 약속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을 144,000으로 묘사합니다. 이 숫자는 완전함을 뜻하는 상징이면서 동시에 군사 계수의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군사입니다. 나팔은 군대를 모을 때 불었습니다. 진군 명령일 때 불었습니다. 승리를 선포할 때 불었습니다.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싸우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뒤를 따릅니다. 이 싸움은 이미 승리가 확정된 싸움인 것입니다.

복음은 입에서는 답니다. 그러나 배에서는 씁니다. 복음을 아는 것은 달콤하지만, 그 복음대로 사는 것은 죽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길은 늘 소수의 길입니다. 다수가 가는 길은 언제나 편안해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언제나 좁은 길 위에 있습니다. 기복주의,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는 달콤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길을 갑니다. 왜냐하면 이 길 끝에 침묵이 아니라 찬송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째 인은 폭발로 끝나지 않습니다. 침묵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패배의 침묵이 아닙니다. 완성의 문턱입니다. 세상이 입을 다물 때, 성도는 노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극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긴 싸움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