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8:13, 9:4)
어느 해 여름, 경기도 외곽의 한 농가에 메뚜기 떼가 몰려들었습니다. 농부는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나섰다가 눈앞의 광경에 얼어붙었습니다. 전날까지 푸르렀던 밭이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줄기만 앙상하게 남은 채, 수개월간 공들인 농사가 흔적도 없이 지워졌습니다. 그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9장에 등장하는 메뚜기 떼의 이미지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갑자기 나타나, 순식간에 모든 것을 삼키고,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메뚜기 떼는 태풍보다 더 두려운 재앙이었습니다. 떼를 이루면 하늘을 덮어 해를 가렸고, 지나간 자리는 전쟁터처럼 황폐해졌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이 무시무시한 메뚜기 떼 이야기를 꺼내기 직전, 본문은 먼저 독수리 한 마리를 등장시킵니다. "화가 있다, 화가 있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계 8:13)고 외치며 공중을 날아가는 독수리의 장면은 단순한 심판의 예고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 이 본문 전체의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독수리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진 동물입니다. 하나는 심판자의 얼굴입니다.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신 28:49). 다른 하나는 보호자의 얼굴입니다.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심판과 보호가 한 날개 아래 공존합니다.
그러니까 독수리가 선포하는 '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을 등진 세상에게는 심판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 독수리가 날개 아래 품어 업어 가는 인도하심입니다. 같은 사건, 전혀 다른 경험, 이것이 요한계시록 전체를 관통하는 역설이며,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인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그 '화' 앞에서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은 세상을 '하늘'과 '땅'으로 나눕니다. 하늘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실재이고, 땅은 아직 죄와 타락이 남아 있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독수리가 날아가는 자리를 '공중'이라고 부릅니다.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공중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에 속한 새 창조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 이 땅의 시간 속을 걸어야 합니다. 천국 시민권을 가졌지만 지상에서 비자를 들고 사는 것처럼, 그들은 하늘의 원리로 땅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신학 언어가 아닙니다. 매우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입니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가족이 아프고 경제가 무너질 때, 노력이 배신당하고 꿈이 꺾일 때,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그 고통의 한가운데에 서게 됩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그 고통을 해석하는 다른 언어가 있습니다. 심판처럼 보이는 것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눈이 있는 것입니다.
그 눈을 잃으면, 공중을 나는 독수리는 그저 재앙의 전령으로만 보입니다. 그 눈이 열리면, 독수리의 날개 아래 우리를 업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다섯 번째 나팔이 울리자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별이 등장합니다. 이 별에게는 무저갱, 곧 악한 영들이 갇혀 있는 깊은 구덩이를 여는 열쇠가
주어집니다.
이 별은 누구입니까? 본문은 헬라어 단어 '핍토', 즉 '추락하다'는 말을 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사단이 번개 같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 10:18)고 말씀하실 때 쓰인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반면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실 때는 '카타바이노', 즉 '내려오다'는 다른 단어를 씁니다. 떨어지는 것과 내려오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는 통제를 잃은 추락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를 가진 강림입니다.
이 별은 무저갱의 열쇠를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라 '받았다'고 기록됩니다. 열쇠의 원래 주인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서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선언하십니다. 결국 이 떨어진 별,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서 열쇠를 받아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쓰이는 존재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심오한 진실이 드러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악은 결코 하나님과 대등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욥기의 이야기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사단은 욥을 치기 위해 하나님께 허락을 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는 허용한다"는 경계를 그어 주셨습니다. 악은 그 선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무저갱이 열리자 '큰 용광로의 연기와 같은 연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이 묘사를 처음 읽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여기엔 섬세한 신학적 대조가 숨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연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온 산에서 연기가 올랐습니다(출 19:18).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뵈었을 때도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했습니다(사 6:4). 연기는 거룩의 언어인 것입니다.
그런데 무저갱에서 나온 것도 연기입니다. 그것도 '용광로의 연기 같은' 연기입니다. 흉내를 낸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의 연기가 빛을 드러내고 생명을 여는 창조의 연기라면, 이 가짜 연기는 해를 가리고 하늘을 어둡게 만드는 역방향의 연기인 것입니다.
사단의 전략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완전히 다른 것을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진짜처럼 보이는 것을 들이밉니다. 번쩍이는 외관, 그럴듯한 논리, 귀를 간지럽히는 약속, 하나님의 흉내를 내되, 결과는 정반대인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입니다. "너 자신을 믿어라. 네 안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원하면 이루어진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 "네가 행복해야 주변도 행복하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 이 말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슬쩍 빼고 '나'를 그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거룩의 언어를 빌려 거룩을 지우는 것입니다.
그 연기에 한번 중독되면 해가 가려지고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방향을 잃은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연기 속에서 메뚜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메뚜기들은 보통 메뚜기가 아닙니다. 전갈의 권세를 받은 메뚜기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전갈처럼 쏩니다.
성경에서 전갈이 등장하는 장면들을 살펴보면 일관된 맥락이 있습니다. 전갈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 곧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신 8:15)은 가나안과 대비되는 광야, 하나님의 보살핌 밖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전갈이 쏜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세상의 원리로 사는 삶이 스스로 자신을 찌른다는 말인 것입니다.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오직 성공만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더 좋은 차, 더 큰 집, 더 높은 자리, 그것들을 손에 넣을수록 만족은 잠깐이었고 허기는 더 깊어졌습니다. 50대가 되어 그가 가진 것들을 나열하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했지만, 정작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두렵다. 이유가 없다. 그냥 두렵다."
전갈에 쏘인 삶이 어떤 것인지 이 이야기는 보여줍니다. 그것은 외부의 적이 가하는 고통이 아닙니다.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향이 자신을 안으로부터 찌르는 고통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여기서 '돈을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좁게 읽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재물에 대한 욕심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무언가에서 존재의 근거와 행복의 원천을 찾으려는 모든 인간의 방향성을 가리킵니다. 명예에서, 인정에서, 권력에서, 아름다움에서, 관계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채우려는 모든 시도가 결국 자기를 찌르는 전갈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은 충격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이것은 먼 미래의 공상과학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전갈에 쏘인 삶, 즉 하나님 없이 세상의 원리로만 사는 삶은 이미 이 땅에서 일종의 지옥을 삽니다. 죽지는 않지만 살아있다고도 할 수 없는 그 지점, 매일 아침이 괴롭고 매일 밤이 공허한 그 지점입니다.
직장 내 끊임없는 경쟁, 비교와 시기, 더 가지려는 욕망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파괴, 성취해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 등이 쌓이면 사람들은 살아있으되 살고 싶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심리학은 이것을 번아웃, 우울, 무기력이라 부르지만, 성경은 더 근본적인 언어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이 겪는 존재론적 공허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이 왜 일어납니까? 모든 갈등과 분쟁이 왜 반복됩니까? 각자 '내 배를 살찌우겠다'는 원리로 수십억 명이 살아갈 때, 그 충돌이 만들어내는 것이 전쟁이고 착취이고 불평등입니다. 전갈들이 서로를 쏘는 세계가 하나님 없는 세상의 민낯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 사업이 잘 된다. 자녀가 명문 대학에 간다. 하나님은 당신을 번성하게 하기를 원하신다." 이 메시지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는 실제로 그런 약속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말을 지키면" 땅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앞부분, "내 말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복만 요구하는 신앙은 거래입니다. "나는 교회에 잘 나가고, 헌금도 드리고, 기도도 하겠다. 그러니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 한다." 이 논리 속에서 하나님은 내 소원을 들어주는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그 도구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신앙은 쉽게 흔들립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복을 조건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시도는 결국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 있는 자는 그 율법을 완전히 지켜낼 수 없기에, 결국 사망의 쏘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복음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조건 없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 그 사랑에 압도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그 사랑이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은 그 사랑의 결과이지, 거래의 대가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삶이 주어집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 전갈에 쏘이는 것이 아니라, 전갈을 밟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본문 4절은 그 원리를 명시합니다. 그 메뚜기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만을 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은 해를 받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것을 잃어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특별히 강인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소망이 땅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앙의 역사를 보면, 재산을 너무 많이 모아서 하나님을 찾게 된 사람은 드뭅니다. 오히려 사업이 무너지고, 관계가 끊어지고, 건강이 꺾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들이 넘칩니다. 세상의 것이 흔들릴 때, 전갈에 쏘이는 사람은 무너지지만,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은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이것이 바로 전갈을 밟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고통으로 쏘려 할 때, 그 고통이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는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메뚜기가 전갈로 쏘아도 그것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쉬운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마귀는 언제나 거짓 가르침, 화려한 유혹, 그럴듯한 목표를 들고 옵니다. 우리 안에도 그것에 반응하는 욕심과 교만이 있습니다. 남보다 더 가지고 싶은 마음, 더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나를 중심에 놓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솟구칠 때,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섭니다. 그 욕심을 따라가면 전갈에 쏘이는 길로 접어듭니다.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 공허하고, 성취해도 만족이 없고, 올라갈수록 더 외로운 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욕심을 밟아버리는 선택을 할 때, 다른 길이 열립니다. 그것은 내려놓음으로 얻는 자유, 비움으로 채워지는 충만, 낮아짐으로 발견하는 존귀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 곧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감옥에서 쓴 글에 '기뻐하라', '염려하지 말라', '평강'이라는 단어들이 가득합니다. 이것은 억지 긍정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발견한 진짜 평안입니다. 전갈이 더 이상 쏠 것이 없어진 자리에서 오히려 온전히 자유로워진 사람의 고백입니다.
공중을 날며 '화, 화, 화'를 외치는 독수리는 재앙의 선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보호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공중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이 땅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재앙과 고통에 노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날개 아래 업혀 있습니다.
메뚜기 떼가 몰려오고, 전갈이 쏘려 할 때, 우리에게는 선택이 있습니다. 그 고통 앞에서 무너져 세상의 것들에 매달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전갈을 밟아버릴 것인가?
인본주의가 속삭입니다. "스스로 신이 되라." 물질주의가 유혹합니다.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해진다." 기복신앙이 흉내 냅니다. "예수 믿으면 다 잘 된다." 이 모두가 거룩한 연기를 흉내 낸 가짜 연기들입니다. 해를 가리고 하늘을 어둡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 연기에 속지 마십시오. 그 전갈에 쏘이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전갈을 밟을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미 그 권세를 우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권세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 욕심과 교만이 솟구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밟아버리는 것, 세상의 것이 흔들려도 하늘 소망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그것이 공중을 나는 독수리의 날개 아래 업혀 사는 삶인 것입니다.
첫 창조의 부산물을 좇는 삶에는 끝이 없는 허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새 창조의 백성으로 하늘 소망을 품고 사는 삶에는,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전갈 꼬리의 독에 중독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전갈을 밟고 서서, 오늘도 공중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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