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요한계시록 9:12~21)
한국전쟁 당시 종군 사진작가였던 한 노인이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전장을 수백 장의 사진으로 찍었지만, 그 사진들을 펼쳐 놓은 순서가 전투가 벌어진 순서는 아니었다. 나는 내 눈에 들어온 순서대로 셔터를 눌렀을 뿐이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도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에서 "첫째 화가 지나갔다"고 할 때, 이것은 역사 속에서 첫 번째 재앙이 끝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밧모섬의 요한에게 보인 환상의 한 장면이 지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의 재앙들은 시간표가 아니라 앨범입니다. 사진의 배열 순서가 곧 사건의 발생 순서는 아닌 것처럼, 환상의 순서가 역사적 사건의 순서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 한 가지 원칙만 제대로 이해해도 요한계시록을 둘러싼 수많은 오해와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유브라데 강, 이 이름을 들으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목덜미가 서늘해졌을 것입니다. 그 강 너머에는 항상 무서운 것들이 있었습니다. 앗수르가 있었고, 바벨론이 있었고, 페르시아가 있었습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처럼, 유브라데 강 건너편의 세력들은 늘 이스라엘을 위협했습니다. 이사야는 그 세력을 "세차게 넘쳐흐르는 유브라데 강 물"이라고 불렀고, 예레미야는 멸망할 바벨론을 향해 책에 돌을 달아 유브라데 강에 던지며 "바벨론이 이렇게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선언을 자세히 읽으면 놀라운 사실이 하나 드러납니다. 그 무서운 유브라데의 세력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죄 속에 빠진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 하나님 스스로 그 강물을 넘쳐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세력은 이스라엘을 치고 난 뒤, 스스로의 죄로 인해 강바닥으로 가라앉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무렵에도 유브라데 강 너머에는 두려운 존재가 있었습니다. 파르티아, 그 막강한 기마 민족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이런 소문이 돌았습니다. 폭군 네로가 사실은 죽지 않았으며, 파르티아로 넘어가 그 무서운 기마대를 이끌고 로마를 역습할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밤마다 유브라데 강 쪽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던 시절, 요한은 바로 그 이미지를 빌려 왔습니다. 유브라데에 결박된 네 천사, 그리고 이만 만의 마병 대. 독자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 무서운 세력조차 하나님의 결박 아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해 겨울, 소아암 병동에서 일하는 한 간호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건 고통 자체가 아니에요. '이게 언제 끝나는지 모른다'는 것이 더 무서운 거예요. 그런데 언제까지라고 날짜를 알려 주면, 아이들이 신기하게도 버텨요."
15절에는 짧지만 무게가 무거운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그 마귀의 세력을 풀어 놓으시는 것은 아무 때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날짜에, 이루어집니다. 그 세력이 활동할 수 있는 시간도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끝나는 시간도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이 우주는 그냥 돌아가지 않습니다. 지구가 자전할 때 사실 엄청난 굉음이 납니다. 우리가 듣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귀가 들을 수 있는 주파수를 아주 좁은 범위로 설계하셨습니다. 만약 지구의 자전 소리, 은하수의 회전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모든 나뭇잎의 소리가 다 들렸다면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정신을 잃었을 것입니다. 들리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이지 않는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년 월 일 시를 맞춰 가며 운행되고 있습니다.
16절에 등장하는 이만 만이라는 숫자, 2억. 세대주의자들은 이 숫자를 보고 중국군 2억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장면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큰 수를 말할 때 "천천이요 만만"이라는 표현을 관용구처럼 씁니다. 시편 68편에서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고, 요한계시록 5장에서 보좌를 둘러선 천사들도 "만만이요 천천"입니다. 이 표현은 숫자를 세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셀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묘한 대비가 있습니다. 마귀의 세력은 "이만 만"이라는 한정된 표현을 씁니다. 반면 계시록 7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할 때는 이렇게 씁니다.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숫자로 표현조차 할 수 없는 무리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아무리 많아도 결국 유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셀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요한이 이 숫자를 통해 전달하려는 역설입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이 파르티아를 두려워했던 것은 그들의 전술 때문이었습니다. 파르티아 기수들은 전진할 때 사자처럼 무섭게 돌진했고, 퇴각하면서도 몸을 뒤로 틀어 정확하게 활을 쏘았습니다. 앞에서도 죽이고, 뒤에서도 죽입니다. 달아나는 것처럼 보여도 죽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의 꼬리를 뱀처럼 묶어 적진을 향해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심리전이었습니다.
요한이 목격한 환상 속의 마병 대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사자 같은 머리, 뱀 같은 꼬리, 그리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뿜어져 나옵니다. 불과 유황은 어디서 먼저 등장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악의 도성들을 심판하실 때 하늘에서 유황과 불을 비처럼 내리셨습니다. 즉, 이 마병 대의 무기는 단순한 전쟁 무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그 자체입니다. 결국 이 마병 대는 스스로 의지를 가진 정복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도구입니다. 공포스러운 겉모습 뒤에 있는 실제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재앙이 지나간 뒤, 20절과 21절에는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슬픈 문장 중 하나가 나옵니다. "회개하지 않더라." 삼분의 일이 죽었습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그 재앙 속에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살아남은 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여전히 우상 앞에 절하고, 여전히 살인하고, 여전히 음행하고, 여전히 도적질했습니다. 왜 삼분의 일만 죽었겠습니까? 나머지 삼분의 이를 위한 자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발로 찼습니다.
이 장면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이 재앙을 통해 무엇을 원하셨을까요? 단순한 심판이었다면 전부를 죽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분의 일만 죽이셨습니다. 그 안에는 분명히 이런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나의 백성들아, 회개하고 돌아오라." 죄목들을 다시 살펴보면, 이것들이 전부 십계명에 등장하는 항목들입니다.
우상 숭배, 살인, 간음, 도적질. 그리고 "복술"로 번역된 헬라어 파르마케이아는 마법이나 주술을 뜻하며, 하나님의 질서를 뒤흔드는 모든 행위를 포괄합니다. 이 죄들의 공통 분모는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다른 무언가를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재산을, 쾌락을, 권력을, 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가장 긴 계명은 무엇입니까? 네 번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놓인 계명은 무엇입니까?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입니다. 히브리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마지막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두 번 반복했습니다. "탐내지 말라… 탐내지 말라."
무엇을 탐내지 말라고 합니까? 이웃의 집, 아내, 종, 소, 나귀.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이 감각 세계의 것들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 계명은 무엇을 말합니까?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에 복을 부어 놓으셨습니다. 그 초월적 시간 안에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질 영생을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이 시간의 세계가 아니라 영원의 세계를 사모하라는 명령입니다.
두 계명을 합치면 십계명의 핵심이 나옵니다. "이 감각 세계의 것들을 탐내지 말고, 영생을 사모하라." 이것이 전부입니다. 나머지 여덟 계명은 이 하나의 명령에서 파생됩니다. 이 땅의 것을 탐하는 사람이 도둑질합니다. 이 땅의 쾌락을 탐하는 사람이 간음합니다. 이 땅의 풍요를 약속하는 신에게 절합니다. 세계관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계명도 지킬 수 없습니다.
민수기 14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앞에서 무너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거기는 거인들이 삽니다. 철기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만도 못합니다." 그러자 온 회중이 통곡했습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나았을 것이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충격적입니다. "언제까지 이 백성이 나를 멸시할 것이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멸시했다고요? 그들은 그저 무서웠을 뿐입니다. 눈앞의 적이 너무 컸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멸시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거대한 적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압도되어, 그 문제를 허락하신 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도 같은 땅을 밟았고, 같은 거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론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우리 밥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까? 그 거인들 뒤에 계신 더 크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어떻게 끝났습니까? 그 엄청난 가나안의 성읍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습니다. 그 대적들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크심을 온 민족 앞에 입증하는 증거물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업이 기울어져 가는 것입니까? 자녀가 기대만큼 자라지 않는 것입니까?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 것입니까? 오랫동안 쌓아 온 것들이 흔들리는 것입니까? 그 걱정의 뿌리를 한 겹 한 겹 벗겨 내다 보면 결국 이 감각 세계의 것들이 나옵니다. 내 소유, 내 명예, 내 안락함, 내 기대. 그것들이 흔들릴 때 우리는 무너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시에 "나는 하늘의 것을 사모하며 산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그게 사실입니까?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달란트를 땅에 묻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주신 것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자기 방식으로 살아 가는 것.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안정을 더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그 결과는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이를 갊이었습니다.
반면 열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종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도 열심히 일했고,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 이익을 자기 것으로 챙기지 않고 주인에게 드렸습니다. 자신이 수고한 결과가 결국 자기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세 살 때 몹시 아팠습니다. 열이 사흘 동안 내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밤새 아이 곁을 지키며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의사가 말했습니다. "이 열이 사실은 몸속에 숨어 있던 균을 전부 태워 버렸어요. 이렇게 앓고 난 아이들이 오히려 면역이 강해집니다." 어머니는 그때서야 그 사흘의 열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허락하시는 문제들이 그렇습니다. 그 문제들은 우리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 감각 세계를 향한 욕심을, 한 겹 한 겹 태워 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이 땅의 것을 내려놓고, 조금씩 하나님을 더 깊이 의뢰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키심입니다. 화려한 지킴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지킴입니다. 그러나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기에, 우리는 그 과정을 은혜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메뚜기에게, 전갈에게, 이만 만의 마병 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재앙 앞에서 세상 것들에 발을 묶인 채 절망하는 사람은, 그 재앙에 집어삼켜집니다. 죽이는 것은 재앙이 아닙니다. 놓지 못하는 욕심입니다.
시편 121편의 시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그는 지금 어떤 상황 속에 있었을까요? 분명히 눈을 들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고개가 숙여진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산을 향해, 더 정확하게는 그 산 너머를 향해 고개를 들었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이것은 의문문이지만, 그 안에 이미 답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기자는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답을 향해 눈을 드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듯이 시로 쓴 것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 지금 어떤 마병 대가 달려오고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그 사자 같은 머리를 들이밀고 있습니까? 그 문제에 눈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눈을 드십시오. 그 문제 뒤에 계신 분, 그 문제를 당신의 인생에 허락하신 분을 보십시오.
그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그 년 월 일 시를 정확하게 붙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끝날 때, 당신을 향해 가장 좋은 것을 내미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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