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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 복음 전파의 사명과 그리스도인의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1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0:9~11)

가을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아침, 공원을 걷다 보면 간혹 이런 광경을 만납니다. 수십 년을 자리를 지키던 커다란 나무가 뿌리째 뽑혀 옆으로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줄기는 멀쩡하고 잎도 아직 푸릇푸릇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죽은 나무입니다. 뿌리가 땅에서 끊겼기 때문입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생명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을 바로 그런 나무로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지으셨을 때, 그 관계의 핵심은 끊임없는 생명의 공급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복'을 뜻하는 '바라크'는 단순히 행운이나 번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그분으로부터 인간의 존재 깊은 곳으로 쉬지 않고 흘러드는 생명력, 그 전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면서 그 관계가 끊겼습니다. 송수관이 잘린 것입니다. 물이 차단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는 이미 생명의 땅에서 뽑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곧 '복이 담긴 소식'을 보내신 것은 바로 그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잘린 송수관을 다시 연결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안에 들어간 자들은 다시 하나님의 생명력을 영원히 공급받게 됩니다. 이것이 '영생'이요, 이 회복의 소식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1장 3절은 말합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여기서 '복 주시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사스'는 과거시제입니다.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이미 모든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복 내려 주옵소서"를 외칩니다. 그 간절한 기도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의 내용을 아직 바로 알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미 연결된 송수관 앞에서 여전히 물이 없다고 울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복을 약속하시면서 처음부터 한 가지를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2~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복이 아브라함에게서 멈추지 않고 흘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정확히 포착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갈 3:8) 이것이 복음의 전부입니다. 나 혼자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그 복음이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것, 거기까지가 복음입니다. 복음은 저수지가 아니라 강입니다.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0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여러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하여야 한다." 여기서 '다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린'은 단순히 반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더 깊이, 더 강화하여'라는 뜻입니다. 작은 책, 곧 복음을 받아먹은 요한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네가 지금까지 전해온 그것을, 더 깊이, 더 열정을 가지고, 더 강하게 전하라.' 복음을 받아먹은 자는 반드시 복음을 전하는 자리로 부름을 받습니다.

물론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그 성령이 눈을 여신 자만이 복음을 알아듣습니다. 하나님 혼자 하시는 것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우리를 그 전도의 자리로 부르십니까?

여기에 아주 아름다운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나무를 주면 가장 효율적입니다. 그냥 손만 뻗으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빵나무를 주시지 않습니다. 씨앗을 주시고, 땅을 갈게 하시고, 씨를 뿌리게 하시고, 비를 기다리게 하시고, 추수하게 하시고, 맷돌에 갈게 하시고, 반죽하게 하시고, 오븐에 굽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농부는 창조의 기쁨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씨앗 하나가 황금빛 이삭으로 변해가는 그 경이로움, 자신의 손으로 구워낸 빵의 향기, 그것은 빵나무에서 따낸 빵이 결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도 똑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영광스러운 재창조의 사역에 동참시켜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핍박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면서도
'이 복음이 아니면 당신이 살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참고, 인내하고, 기도하고, 눈물 흘리며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안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 눈물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사망으로 떨어져 가는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통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전도의 자리로 부르심으로써 바로 그 눈물에 우리를 참여시키십니다. 전도의 명령은 의무 이전에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리로의 초청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부득불'이라 번역된 헬라어 '아낭케'는 매우 강한 단어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에서는 간혹 신탁이 선포되었습니다. 신탁의 당사자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피하면 벌은 벌대로 받고, 그 운명은 운명대로 따라왔습니다. 그 때 쓰인 단어가 바로 '아낭케'입니다. 바울은 그 단어를 가져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또 로마서 1장 14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빚진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오페일레테스'는 갚지 않으면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악성 채무자를 가리킵니다. 복음을 먼저 받은 자는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9장 23절에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참예'에 해당하는 '순코이노노스' '함께 나누는 자', 곧 '공동 참가자'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복음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은 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음식을 입에 넣고 삼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받았으나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세계 선교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사역하는 수천 명의 선교사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목사님은 진짜와 가짜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복음에 대한 정확한 정의도 내리지 못하면서 선교지에서 학교를 짓고 병원을 짓고 빵 공장을 짓는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선교가 아니라 봉사입니다. 봉사가 나쁜 것이 아니지만, 봉사와 선교는 다릅니다.

그 대회에서 목사님은 위클리프 선교회 소속의 한 젊은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어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부족을 찾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부족에게는 말은 있었지만 문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순서가 있었습니다. 먼저 그들의 말을 배우고, 그 말에 맞는 문자를 만들고, 그 문자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 문자를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완성되려면 앞으로 20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해가 지면 마을 전체가 잠에 들었고, 해가 뜨면 일어나 일했습니다. TV도, 인터넷도, 자동차도, 영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저녁 무렵, 그들은 마을 뒷산에 올랐습니다.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200여 가구의 굴뚝에서 일제히 저녁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그들은 매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 저 불쌍한 사람들에게 꼭 아버지를 나타내시옵소서.'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의 석양 앞에서 드렸던 기도를 그들은 날마다 다시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목사님은 그들의 숙소를 찾아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목사님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몸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순결과 순수라는 것에 냄새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부부가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한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가 처음 한 말이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왜 이제 오셨어요?" 그 말을 전하며 그 아내는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코끼리 근육병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 소녀가 매일 수 마일씩 걸어서 일가친척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렇게 세워지고 있습니다.

기원전 490년, 아테네의 마라톤 평원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이끄는 수십만 대군에 맞서 싸운 아테네의 병사는 불과 수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가 이겼습니다. 그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한 병사가 달렸습니다. 42.195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려 아테네 광장에 이르러 외쳤습니다.
"우리가 이겼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 승전보가 구원의 복음보다 더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건짐을 받았다는 이 소식이, 한낱 전쟁의 승리보다 덜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의 발길은 쉴 수가 없습니다. 너무 기뻐서, 나누지 않고는 못 배기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노래합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 그 발은 아름답습니다. 빠르거나 강한 발이 아닙니다. 코끼리 근육병을 앓으면서도 수 마일을 걸어가는 발, 아프리카의 석양 앞에서 날마다 눈물로 기도하는 무릎, 모든 것을 내려놓고 중국을 향해 떠나는 발걸음, 그 발들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영국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그 시대 최고의 크리킷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C. T. 스터드는 어느 날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고 인도로, 그 다음에는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예일대 출신의 미국 갑부 윌리엄 보든은 졸업 직후 전 재산을 선교 사역에 헌납하고 이집트로 떠났다가 스물다섯의 나이에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성경책 여백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남겨두지 않겠다. 물러서지 않겠다. 후회하지 않겠다." 미친 사람들입니까? 세상이 보기에는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진짜 가치인지, 무엇이 진짜 기쁨인지, 무엇이 진짜 삶인지를 말입니다.

포항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전도유망한 공학자였던 한 젊은이가 중국 선교사로 떠나면서 파송 교회에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는 모임에는 빈 의자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더 빠르고 편리하고 화려한 것에는 구름처럼 사람이 모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확연히 다른 두 종류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기에 이제 떠납니다.' 그는 떠났습니다. 부모님은 말렸고, 친척들은 안타까워했고,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진짜인지를 말입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는 조선 땅을 사랑했던 수백 명의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전염병으로 죽고, 과로로 쓰러지고, 때로는 핍박의 칼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 묘비들 앞에 서면 한 가지 공통된 고백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이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더 깊이, 더 강하게, 더 열정을 가지고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 명령은 요한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먹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전도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사명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을 아는 것, 그것이 전도의 시작입니다. 복음을 들었을 때
'왜 이제 오셨어요?'라고 물었던 그 소녀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입을 다물고 발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뿌리가 뽑힌 나무가 다시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복음은 바로 그 기적의 소식입니다. 그 기적을 이미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소식을 혼자 품고 살 수는 없습니다. 삶으로, 입으로, 발걸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진정으로 받아먹은 사람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