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요한계시록 11:7~13)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에서 늘 존경받고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사회에 기여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어야 잘 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1장은 그 생각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지를, 요한은 충격적일 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다 보면 자꾸 헷갈리는 부분이 생깁니다. 인의 재앙, 나팔 재앙, 대접 재앙이 같은 사건의 반복이라고 했는데, 막상 내용을 보면 서로 다릅니다. 음녀의 심판, 바벨론의 심판, 거짓 선지자의 심판도 같은 사건이라고 했는데, 각각 혼합주의, 경제적 탐욕, 신비주의를 다루고 있어서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혼란을 단번에 풀어주는 비유가 있습니다. 디즈니랜드의 입체 영화관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극장은 돔 형태로 생겼는데 천장 전체가 스크린입니다. 동쪽 화면에서는 농부가 밭을 갈고, 서쪽 화면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남쪽 화면에서는 시장이 북적이고, 북쪽 화면에서는 노인들이 담소를 나눕니다. 이 모든 장면은 동시에 일어나는 하나의 풍경입니다. 다만 사람의 눈이 좁아서 한꺼번에 다 볼 수 없으니 하나씩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한이 딱 그 상황이었습니다. 교회 시대라는 하나의 시간 안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각기 다른 방향의 화면으로 나누어 보고, "또 내가 보매"라는 말로 이어가며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이 표현이 스무 번 넘게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세 재앙은 교회 시대 동안 세상에 동시에 내리는 심판을 한번은 자연재해의 화면으로, 한번은 영적 재앙의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도가 종말을 향해 점점 세진다는 것을 4분의 1, 3분의 1이라는 숫자로 표현합니다. 이 "입체영화관"의 개념을 머릿속에 붙들고 있으면, 11장이 전혀 다르게 읽히기 시작합니다.
11장은 세상이 재앙을 받는 장면이 아닙니다. 그 재앙의 한가운데서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화면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은 교회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증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자들이고, 모세와 엘리야처럼 결국 승리하게 될 자들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7절은 그 삶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여기서 "올라오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성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증거가 끝난 뒤에 짐승이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라, 이 짐승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마귀의 처소인 무저갱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이 짐승이 그 뿌리와 본성에 있어서 철저히 악마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짐승"이라는 표현에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존재인데 굳이 "그"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이미 이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표현을 읽는 순간 다니엘서 7장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환상으로 본 사자, 곰, 표범, 열 뿔 달린 넷째 짐승은 바벨론, 메데, 바사, 로마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았던 제국들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지금 그 짐승들이 상징하던 세력, 곧 교회 시대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을 우리들 앞에 다시 소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무저갱에 결박되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마귀가 아무것도 못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탈취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는 일을 그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결박입니다.
그러나 집에서 세간을 빼앗긴 도둑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듯, 마귀는 끝까지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 발버둥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 주변을 배회하며 틈을 노립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날마다 경험하는 영적 싸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두 증인이 죽자 그 시체는 "큰 성 길"에 내버려집니다. 그런데 그 성의 이름이 독특합니다.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도 합니다. 세 개의 이름이 동시에 붙는 도시는 지도 위에 없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소돔은 타락이 극에 달해 하나님의 불 심판을 받은 문명의 상징입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한 세력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여버린 세상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이 세 이름이 겹쳐지는 곳, 그것이 지금 교회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바로 이 세상입니다.
게다가 세상은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 길에 방치하며 장사조차 지내주지 않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시신을 묻어주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극악한 모욕이었습니다. 길에 버려진 시체는 짐승의 먹이가 되고 행인의 발에 밟혔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그런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광경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냅니다. 마치 명절을 맞은 것처럼 말입니다.
왜 세상은 이토록 교회를 미워할까요? 본문은 간단하게 답합니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죄에는 묘한 습성이 있습니다. 죄는 혼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죄책감이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는 반드시 공범을 만들려 합니다. 같이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죄책감은 옅어지고, 그 행동은 점점 보통 일처럼 느껴집니다. 학창 시절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이 친구들을 끌어들이려 했던 것, 야한 잡지를 구하면 꼭 반 전체에 돌리던 것, 모두 같은 원리입니다. 죄는 전염을 통해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그런데 어떤 무리가 그 전염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아무리 분위기가 형성되어도 흔들리지 않고, 아무리 권해도 함께 물들지 않습니다. 그 존재 자체가 세상에게 불편한 거울이 됩니다.
아프리카 오지로 간 한 선교사가 처음 거처를 마련하고 문 밖 나무에 거울을 하나 걸어두었습니다. 난생처음 거울을 본 마을 사람들이 신기해서 몰려들었습니다.
얼마 후 추장 부인이 선교사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저 물건 안에 괴물이 들어있습니다." 선교사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건 거울이에요. 안에 보이는 게 바로 당신 얼굴입니다." 부인은 잠시 그것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거울을 가져가더니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숴버렸습니다. 자신의 실제 모습을 정면으로 보는 것이 그만큼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게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거울처럼 세상의 민낯을 비춥니다. 세상은 그 거울을 견디지 못해 박살내려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빛이었고, 그 빛이 사람들의 어두운 속내를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세상은 그 빛을 끄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성도라 자처하는 이들이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 다시 나타나신다면, 그분은 그 자리에서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빛을 두려워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생명의 기운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이 한 단어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사흘 반은 앞서 두 증인이 예언하던 1,260일, 곧 교회 시대 전체와 대비되는 짧은 시간입니다. 세상이 교회의 죽음을 보며 환호하고 축제를 벌이는 그 시간이 사흘 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던 승리가 실은 찰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 지나자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기운이 흘러 들어옵니다. 이 장면은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을 그대로 떠올리게 합니다.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 아무런 생기도 남아있지 않은 그 뼈들 위로 하나님의 생기가 임하자 뼈들이 서로 맞붙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군대처럼 일어섰던 그 장면입니다.
두 증인의 부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으시자,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시체들이 스스로 두 발로 일어섭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까까지 그 시체를 보며 기뻐하고 선물을 보내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조롱과 축제가 공포로 바뀌는 데 걸린 시간은 단 한순간이었습니다.
두 증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리로 올라오너라 하는 큰소리가 하늘로부터 자기들에게로 울려오는 것을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이 표현은 성경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승천 장면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요한은 지금 두 증인의 승천을 예수님의 승천과 같은 언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이 걷는 길은 예수님이 먼저 걸으신 길입니다. 고난, 죽음, 부활, 그리고 영광. 그 길의 끝이 어디인지를 두 증인의 승천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들이 그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원수들이 두 증인의 시체를 보며 기뻐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두 증인의 승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됩니다. 외면할 수 없습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교회의 마지막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승천 직후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도시의 10분의 1이 무너지고 7천 명이 죽습니다. 숫자들이 상징적입니다. 10분의 1과 7천이라는 숫자는 전멸이 아니라 심판의 경고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이 "두려움에 싸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라고 기록됩니다.
이것이 놀랍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세상 사람들이 재앙을 당한 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은 여기가 거의 유일합니다. 나팔 재앙에서 사람들은 재앙이 쏟아져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손으로 만든 우상에게 더 절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장면에서는 두려움이 찬양으로 바뀝니다.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자들에게 무언가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리 죽이려 해도 죽지 않는 것, 아무리 짓밟아도 다시 일어서는 것, 그리고 마침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땅만 흔들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도 흔들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먼 훗날의 어떤 특별한 무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시대 전체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이 이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를 솔직하게 돌아보면, 어딘가 본질적인 것이 뒤집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고 찔림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이 교회의 부패를 걱정하고 조롱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빛이 어두움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 것입니다. 빛이 빛으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에게 더 이상 불편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경고입니다.
세상이 나의 존재를 편안하게 여긴다면, 한 번쯤 자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세상과 너무 닮아버린 것은 아닌가, 내가 빛을 거두어들인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나 두 증인의 이야기는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길바닥에 버려진 시체는 결국 두 발로 일어섰습니다. 원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 결말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고난 앞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합니다. 약할 때가 있습니다. 짓밟힐 때가 있습니다. 시체처럼 버려지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도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리로 올라오너라"는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오늘도 자리를 지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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