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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약할 때 강함 되시는 하나님의 나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9.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요한계시록 11:7~13)

장례식에서 우는 사람은 유족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상한 장례식이 하나 나옵니다. 죽은 자들의 가족이 우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서로 예물을 주고받으며 축하합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이 그려주는 장면입니다. 두 증인, 곧 교회가 죽임을 당하자 세상이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장사도 지내주지 않습니다. 죽은 자에게까지 모욕을 더합니다.

그 기간이 '
사흘 반'이라고 합니다. 앞서 배운 삼 년 반, 한 때 두 때 반 때, 1260일, 42개월과 동일한 기간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사흘 반'이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요한계시록을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의 패턴이 보입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의 기간을 표현할 때는 '사흘 반', '삼 년 반'처럼 짧게 느껴지는 단어를 씁니다. 반면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나타내는 영광스러운 사역의 기간을 표현할 때는 '42개월', '1260일'처럼 긴 시간으로 느껴지는 표현을 씁니다. 둘 다 같은 기간이고, 같은 시대를 서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위로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곧 끝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 치료가 얼마나 계속됩니까?" 의사가 대답했습니다. "여섯 달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분의 표정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여섯 달, 그 다음에는 끝이구나.' 끝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버틸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사흘 반'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위로입니다. 이 고난에는 끝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흘 반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죽어 있던 두 증인이 두 발로 일어섭니다. 그리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 장면을 세상이 '
구경'합니다.

여기서 '
구경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데오레운타스'입니다. 단순히 눈으로 바라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식하다', '바르게 알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세상이 정확하게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 저 사람들이 옳았구나.'

지금 이 순간,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봅니까? 좋은 주말을 교회에서 보내야 하고, 자기들이 보기에는 있지도 않은 것 같은 하나님을 믿느라 이렇게 수고하는 우리가 참으로 가련해 보일 것입니다.

어떤 직장인은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동료들에게 '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어떤 학생은 거짓말로 성적을 올리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가 경쟁에서 뒤처집니다. 어떤 사업가는 부정한 방식으로 이익을 취하기를 거부했다가 계약을 잃습니다. 세상이 볼 때 이런 사람들은 어리석고 약합니다. 그러나 '데오레오'의 날, 바르게 인식하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요한계시록 9장에는 '
호이 로이포이', 곧 '남은 자들'이 등장합니다. 엄청난 재앙을 겪고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상에게 절하고, 살인하고, 음행하며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11장에도 똑같은 단어, '호이 로이포이'가 다시 나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같은 사람들이 9장에서는 돌아오지 않다가 11장에서는 돌아옵니다. 무엇이 달랐습니까?

9장과 11장 사이에 두 증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앙이 아니라 복음이 그들을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인간은 재앙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쳤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까? 대지진이 나고 쓰나미가 덮쳤을 때, 세상이 겸손해졌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재앙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더욱 자기 자신에게로 움츠러들 뿐입니다. 남은 자들이 돌아오는 길은 단 하나, 복음뿐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두 증인들의 삶을 타고 흐릅니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가입니다. 이사야 43장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처음에는 낯설고 심지어 억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내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그럼 나는 뭐야?'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독사)'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 온유, 화평, 절제, 겸손, 오래 참음, 이 성품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에 보일 때, 세상이 그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어떤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10년이 넘도록 그 어머니는 매일 병실을 찾아가 아들의 손을 잡고 이야기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을 옆 병실 보호자가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보호자가 물었습니다. "어머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지치지도 않으세요?"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시거든요. 그 사랑이 나를 여기 오게 해요." 그날 그 보호자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삶이 하나님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합니까? 고린도후서 12장이 대답합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여기서 '약하다'는 것이 가난하고 무능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힘이 있고, 언제든 합법적으로 그 힘을 쓸 수 있음에도, 나를 위해 그 힘을 쓰지 않고 오히려 남을 위해 내어주는 것이 약함입니다.

어떤 회사 대표가 있었습니다. 경기가 어려워지자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그는 임원들과 함께 먼저 자신의 급여를 절반으로 줄이고 복지 혜택을 반납했습니다.
"내가 먼저 줄여야 직원들을 지킬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소식이 사내에 퍼지자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우리도 조금씩 줄이겠다'는 서명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대표는 분명히 힘이 있었습니다. 결정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보기에 그것은 '약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약함에서 공동체가 살아났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은 저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지? 어떻게 저 원수를 용서하는가? 저렇게 살아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나, 참 약해 빠졌구나.' 이것이 약한 자의 삶이 받는 평가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그 평가를 들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
'을 추구합니다. 더 강한 교회, 더 큰 영향력, 더 많은 자원, 내가 힘을 내야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고 역사는 이것을 거듭 반증해 왔습니다. 식민주의의 옷을 입고 힘으로 전파된 복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강압과 권력의 그늘 아래 세워진 기독교 문명은 결국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그 자리에 다시 선교사를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의 원리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기도하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열심히 힘을 내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울 테니 도와주세요'가 아닙니다. 사탄의 검은 계절이 짙어가는 세상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의 응답으로 당신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남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에게는 자기 계획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삶을 통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모가 이끄는 대로 따라갑니다. 배가 고프면 울고, 무서우면 달려가 품에 안깁니다. 그 의존이 약해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안전한 자리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기도했습니다.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이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를 신명기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수효가 적은 연고로 내가 택했다." 왜 작은 수를 택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비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크고 강한 것에 기대면 하나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상한 말씀을 합니다. 예수께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
온전케 되셨다"고 합니다. 영원 전부터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통해 온전해지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부족하셨다가 완성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사역, 곧 하나님의 목적이 그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 고난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을 돌로 치려는 자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 배반한 자들을 용서하는 것, 침 뱉고 조롱하는 자들 앞에서 침묵하며 인내하는 것이 그분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빌립보서 2장에 나옵니다.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에게,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로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1장 13절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두 증인이 죽음으로 살아내니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과 정확히 같은 구조입니다.

한 외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술실에서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다행히 환자는 살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병원 측에 자진 보고했습니다. 덮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것을 숨기면 다음번에 같은 실수를 하는 후배 의사가 생긴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보고로 인해 수술 프로토콜이 개선되었고, 이후 같은 실수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끄러움이 다른 이들의 안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나의 죽음을 통해 다른 이들이 살아납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통해 다른 이들을 구원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 이름들을 지금은 모르지만, 천국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닙니다. 거대한 유기체인 교회 안에서 한 지체로서의 삶입니다. 심장이 뛰어야 피가 돌고, 간이 해독해야 몸이 살고, 다리가 움직여야 갈 길을 갑니다. 나를 희생하여 다른 이에게 유익을 주고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성탄절은 예수께서 오신 날입니다. 왜 우리 주님은 마구간에서 나셨습니까?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까? 군중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자기들에게 세상의 힘을 가져다줄 강한 왕을 원했습니다. 그 앞에 주님은 조용히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왜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했습니까? 그가 전쟁으로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힘을 소유한 자가 짓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은 평화의 왕 솔로몬이 짓습니다. '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샬롬', 곧 평화입니다. 마구간과 나귀 새끼는 곧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복음은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하고 인내하는 그 죽음에서 흐르는 피를 타고 전파됩니다. 우리가 몸에서 힘을 빼지 않으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통해 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능력의 통로이지, 거기에 우리의 힘을 보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내가 매일 죽노라." 이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매일 자신의 욕망과 자아와 기대를 십자가에 못 박는 실제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 비움의 삶의 모델을 한 분 보내셨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능력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다 가신 분, 예수님입니다.

"나는 아버지가 하라는 말만 했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했다." 그래서 그분은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나를 본 자들은 아버지를 보았다." 이 삶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나를 본 자들은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평화가 옵니다. 내가 이기려 하니 다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전쟁은 결국 '내가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그 욕망을 내려놓는 자리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옵니다.

다른 이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져 주십시오. 시체에게 무슨 질투가 있고 경쟁이 있겠습니까. 꼴찌의 평안을 느껴보십시오.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실력이 없어서도 아닌, 자발적 꼴찌의 평안,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니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그 평안을 누리십시오.

이 세상에 꼴찌의 모습으로 오셔서, 꼴찌의 삶을 살다가, 꼴찌들의 죽음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우리도 그분을 닮아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