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 11장 1~6절
1 나는 지팡이와 같은 측량자 하나를 받았는데, 그 때에 이런 말씀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일어서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을 측량하고,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세어라.
2 그러나 그 성전의 바깥 뜰은 측량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그것은 이방 사람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3 나는 내 두 증인에게 예언하는 능력을 줄 것이다. 그들은 천이백육십 일 동안 상복을 입고 예언할 것이다."
4 그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 서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요, 촛대 두 개입니다.
5 그들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들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 활동을 하는 동안에, 하늘을 닫아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세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몇 번이든지, 어떤 재앙으로든지, 땅을 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습니다. 길을 걷다가 젊은 남자에게 아무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온몸에 멍이 들고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진 채였습니다. 경찰이 범인을 잡아 노인 앞에 세웠을 때, 그 젊은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노인이 당연히 엄한 처벌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 선처해 주십시오." 법정에서도 그는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노인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내가 살면서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들이 저 사람이 내게 한 짓보다 훨씬 많았으니까요." 그 노인이 싸움에서 진 것일까요? 아니면 이긴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11장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10장에서 복음을 받아먹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복음을 삶으로, 입으로 전해야 하는 사람들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받아먹은 두루마리는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지만 배 속에서는 쓴맛이 났습니다. 복음을 받아 누리는 것은 달콤하지만, 그것을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일은 쓴 싸움을 수반합니다. 11장은 바로 그 싸움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요한은 지팡이 같은 갈대를 받습니다. 당시 약 3미터 길이의 측량용 갈대로, 에스겔서 40장에서도 에스겔이 동일한 도구로 성전을 측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왜 복음 전파의 책임을 위탁받은 직후에 갑자기 척량 명령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고대 세계에서 척량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파괴를 위한 척량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호를 위한 척량이었습니다. 어떤 구조물을 허물 때도 먼저 재고, 울타리를 쳐서 안쪽을 지키기 위해서도 먼저 쟀습니다. 여기서 척량의 대상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이 기록된 AD 95년에는 성전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AD 70년에 로마의 타이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초토화하면서 성전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척량하라고 명령받은 성전은 실제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직접 재십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길은 험한 길이 될 것이다. 대적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너희를 무너뜨리려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의 울타리가 되어 이 땅에서 너희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너희를 지키겠다.' 척량 명령은 하나님의 보호 선언입니다.
그런데 2절은 의아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전 바깥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이방인들에게 내어 주어 짓밟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전의 구조를 떠올려보면, 맨 바깥 이방인의 뜰에서 안쪽으로 들어올수록 거룩함의 등급이 높아졌습니다. 이방인이 그 경계를 넘어 안뜰로 들어오는 것은 즉각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침범이었습니다.
신학자 리처드 보캄은 이 안마당과 바깥마당의 구분을 성도의 내적 실존과 외적 경험의 구분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영적 신분과 궁극적 운명은 절대적으로 보호하시지만, 그들의 외적인 삶, 다시 말해 이 땅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겪는 삶은 이방인들이 밟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마흔두 달, 교회시대 전체, 곧 우리의 일생입니다.
그런데 이 '내어 주심'을 설명하는 헬라어 '에도떼'는 부정과거 수동태입니다. 이방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성도를 짓밟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의해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의 삶에 찾아오는 고난과 전투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세상에 밟히도록 내어 주시는가. 그러나 쇠를 단련하려면 풀무불이 필요하고, 금을 정제하려면 용광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전투를 통해 단련하시고, 그 고통을 통해 자신의 힘을 의지하던 삶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삶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삶, 그것이 거룩이고, 우리는 수많은 전투를 통해 그 거룩을 조금씩 쌓아 갑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차피 승리하실 그 전쟁에 우리를 동참시키심으로써, 그 승리의 영광을 우리와 함께 누리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이미 주셔 놓고도 그들로 하여금 직접 싸워 빼앗게 하신 것은 그 이유에서였습니다. 땀과 피를 흘려 얻은 승리에는 함께 나눌 영광이 있습니다.
3절에서 하나님은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어 1260일 동안 예언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두 증인은 누구입니까? 4절은 그들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스가랴서 4장의 환상에서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 스가랴의 환상에서 일곱 등대 곁에 서 있던 두 감람나무는 당시 유대의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상징했습니다. 왕과 제사장, 즉 왕 같은 제사장의 권세를 지닌 자들입니다.
계시록 1장 20절에서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 곧 전체로서의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두 촛대는 무엇을 나타냅니까? 성경에서 둘이라는 숫자는 증거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숫자입니다. 신명기는 두 증인이나 세 증인의 입으로 사건이 확정된다고 말하고(신 17:6, 19:15),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둘씩 보내셨습니다(막 6:7). 두 촛대는 증거하는 교회,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자로서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두 증인은 교회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의 권세를 지니고 이 땅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입니다.
잠깐, 이 마흔두 달이라는 기간에 대해 설명이 필요합니다. 다니엘서 9장 24~27절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종말까지를 70이레로 정하셨습니다. 성전 재건 명령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 곧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가 69이레입니다. 그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에 성전이 파괴됩니다. 실제로 AD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의 기간이 반 이레, 3년 반, 곧 교회시대입니다. 계시록과 묵시문학이 이 기간을 42달, 1260일, 한때 두때 반때로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그 마지막 한 이레 7년을 역사의 끝으로 밀어내어 '7년 대환난'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본래 의도와 다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시대 전체가 성경이 말하는 환난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대환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너무 호락호락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5절과 6절은 교회가 가진 권세를 묘사합니다. 교회를 해하려는 자들을 향해 그 입에서 불이 나와 소멸한다고 합니다. 하늘을 닫아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하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며, 여러 재앙으로 땅을 친다고 합니다.
이것은 엘리야와 모세의 이야기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을 숭배하는 아합 왕과 이세벨, 그 선지자 850명과 정면으로 대치했습니다. 삼 년 반 동안 하늘을 닫아 비를 막아 버렸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바로와 그 술객들에 맞서 열 가지 재앙으로 강대한 제국을 굴복시켰습니다. 이 두 장면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사탄의 세력 간의 영적 전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들입니다.
요한은 교회의 권세를 바로 이 두 장면으로 묘사함으로써, 교회가 이 땅에서 그 악의 세력과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자들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게 그 권세를 행사합니까? 정말 하늘에서 불을 내려 원수를 태워 죽입니까? 현대판 재앙으로 악인들을 심판합니까?
우리 입에서 나오는 불의 정체를 예레미야서 5장 14절이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내 말로 불이 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논리정연한 변론이나 맹렬한 비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선포 그 자체가 세상을 심판하는 불입니다.
그런데 3절을 다시 보십시오. 두 증인이 권세를 받아 예언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있다고 합니다. 굵은 베옷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참회할 때 입던 옷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통회할 때,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할 때 입던 바로 그 옷입니다. 권세를 받은 자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베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악의 세력과 싸우는 무기는 물리적 파워가 아닙니다. 회개입니다. 참회입니다. 우리의 전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죄와 싸우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날마다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그 회개의 삶이 우리의 전투인 것입니다.
그 회개의 결과로 우리 안에 맺히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인내,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열매들을 무기로 세상과 싸우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거짓으로 공격합니다. 우리는 그 공격 앞에 사랑이라는 칼을 빼어 들고, 온유와 겸손이라는 창을 집어 들어 맞섭니다. 세상은 절대 힘으로 정복되지 않습니다. 이솝 이야기에서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빛이었듯이, 완고한 세상의 마음을 여는 것은 강압이 아니라 사랑의 온기입니다.
이 글의 첫머리에 등장한 그 노인을 기억하십니까? 폭행을 당하고도 가해자를 용서하고 선처를 구한 그 노인. 외적으로만 보면 그는 짓밟힌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용서의 순간, 그 노인이 가진 권세는 세상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가질 수 있는 권세, 사랑할 수 있는 권세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바보 같아 보이는 죽음이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침 뱉음을 당하며, 채찍에 찢기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완전한 패배였습니다. 그러나 그 패배보다 더 큰 승리는 인류 역사에 없었습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셨고, 연약함으로 강함을 정복하셨습니다.
우리의 전투는 바로 그 전투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성전 바깥마당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참된 우리의 실존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밟히는 그 모습이 1260일 동안 권세를 받아 세상을 이기는 모습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마태복음의 그 말씀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은 교회가 구원의 문지기가 되어 허락하거나 취소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는 이 땅과 하나님 나라의 운용 원리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교회도 이 땅에서 그 원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랑으로 묶으면 하나님 나라에서도 그것이 유효하고, 사랑으로 풀면 하나님 나라에서도 풀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는 사랑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 교회는 성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성공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충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힘써 좇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세상을 짓밟으며 승전가를 부르는 것이 우리의 권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게 밟히고도 그들을 용서하고, 인내하고, 끝내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것, 세상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 능력이 우리의 권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엑수시아',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권세, 우리 안에 이미 심겨진 그 권세를 사용하십시오.
우리는 42달 동안, 이 일생 동안 세상으로부터 짓밟힐 것입니다. 그것은 정해진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짓밟힘이 곧 싸움이고, 그 싸움이 곧 승리입니다. 외적으로 밟히는 그 자리에서 우리 안의 사랑과 용서와 인내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정말 승리하고 싶으십니까? 용서하십시오. 정말 이기고 싶으십니까? 사랑하십시오. 정말 정복하고 싶으십니까? 인내하십시오.
그 역설이 당신의 삶에서 온전히 이해되기를, 그리고 그 역설 안에서 당신이 매일 이기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 복음 전파의 사명과 그리스도인의 삶 (0) | 2026.03.19 |
|---|---|
| 복음의 단맛과 쓴맛 (0) | 2026.03.12 |
| 마귀의 세력과 하나님의 심판 - 이 만 만의 마병 대 (1) | 2026.03.06 |
| 화(禍) 속에서 전갈을 밟다 (0) | 2026.02.27 |
| 거기서 나오라 (0) | 2026.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