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0:8~11)
단맛과 쓴맛이 동시에 존재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자몽이 그렇고, 잘 볶은 원두 커피가 그렇습니다. 처음 혀에 닿을 때의 향긋한 달콤함과, 목구멍을 넘어갈 때 올라오는 깊은 쓴맛이 묘하게 어우러집니다. 그 두 가지 맛이 충돌하지 않고 하나로 섞일 때, 우리는 그것을 '깊은 맛'이라고 부릅니다. 요한계시록 10장이 말하는 복음의 맛이 정확히 그렇습니다. 입에서는 꿀처럼 달고, 배 속에서는 쓰라립니다.
요한계시록 10장은 재앙의 한가운데에 갑자기 끼어드는 단락입니다. 8장과 9장을 가득 채운 나팔 재앙들인 피와 불과 유황, 메뚜기 떼와 군마의 굉음이 쏟아진 직후, 요한의 시선은 전혀 다른 장면으로 옮겨갑니다. 힘센 천사 하나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고, 얼굴은 해처럼 빛나며, 발은 불기둥 같습니다. 그리고 그 손에는 작은 책 하나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장면이 왜 지금 이 자리에 등장합니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바로 직전 장면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9장의 결말은 이렇게 끝납니다. 이 모든 재앙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만든 우상 앞에 엎드리기를 멈추지 않았고, 살인과 음행과 도둑질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나팔이 울리고,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타올라도 인간의 마음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요한계시록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세기 8장에서 하나님은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재앙을 멈추신 이유가 인간이 뉘우쳐서가 아니라는 것이 섬뜩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너무도 완고하여 재앙으로는 도무지 돌이킬 수 없기에, 다른 방법을 쓰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 다른 방법이 바로 복음입니다. 재앙의 한복판에서 펼쳐진 작은 책은, 심판이 아닌 은혜만이 인간을 바꿀 수 있다는 하나님의 오래된 결론을 다시 한번 선언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천사의 손에서 그 책을 받아먹습니다. 그리고 입에서는 꿀처럼 달았다고 고백합니다. 복음이 달다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수천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꿀보다 더하다"고 노래했고(시 119:103), 다른 시편은 말씀이 "꿀과 송이 꿀보다 달다"고 찬양했습니다(시 19:10).
오래 기도하고 나서 마음이 맑아지는 그 느낌,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깨닫는 순간의 그 해방감,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삶의 의문이 복음의 빛 안에서 갑자기 투명해지는 그 경험이 입에서 느끼는 단맛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맛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고백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먹고 나니, 배 속은 쓰라렸습니다. 복음을 삼킨다는 것은 그것을 듣고 감동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삶 속으로 내려보내는 일입니다. 그 여정이 쓴 것입니다.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분이었고, 용서에 관한 설교라면 수십 번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직장에서 자신의 공을 가로채 승진한 동료의 이야기를 누군가 꺼냈습니다. 그 어머니는 대화 내내 씁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중에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설교 들을 때는 '그렇지, 용서해야지' 싶어요. 근데 막상 제 일이 되니까 도저히 그게 안 되더라고요."
복음이 입에서 배 속으로 내려가는 순간, 그 단맛은 쓴맛으로 바뀝니다. 수십 년간 굳어진 습관을 말씀 앞에서 꺾어야 할 때,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방식을 거스르며 살아야 할 때, 그 쓴맛이 옵니다. 바른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고집스럽다", "독선적이다", "외곬수다"라는 말을 들을 때도 그렇습니다. 어떤 날은 이 세상에서 혼자만 다른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 것 같은 고독감이 밀려옵니다.
이것은 낯선 경험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것이 기쁨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입으로 이렇게도 탄식했습니다. "어찌하여 나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렘 15:18). 말씀을 받아먹은 사람의 삶이 본래 그런 것입니다. 입과 배가 동시에 증언하는 맛은 달고도 쓴, 그 역설이 복음을 삼킨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의 원형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신 삶의 결말은 배신과 멸시와 수모, 그리고 십자가였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 상속자'라고 부릅니다. 그분이 받으신 영광의 분깃을 함께 받는 상속자. 그런데 그분이 받으신 분깃 가운데는 고난도 있었습니다. 상속은 영광만이 아니라 고난도 함께 넘겨받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말이 이 진실을 압축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참여하십시오"(딤후 1:8). 복음과 고난은 떼어낼 수 없는 한 쌍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알고도 복음 앞에 나올 사람이 있겠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것을 알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 그분은 망대를 짓기 전에 비용을 먼저 계산하고, 전쟁에 나가기 전에 승산을 먼저 따져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8~31).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도 그와 같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무게를 먼저 헤아려 보고 나서 발을 내딛으라는 것입니다. 달콤함만 듣고 들어온 사람은 쓴맛에 쓰러지기 쉽습니다. 쓴맛까지 듣고 그래도 그 길을 가겠다고 나선 사람이, 진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들어도 결국 돌아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찰스 디킨스는 스크루지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그 구두쇠 영감은 천사에게 이끌려 자신의 장례식 장면을 목격한 뒤에야 비로소 오늘을 다르게 살기 시작했습니다. 내 삶의 끝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지금 이 쓴맛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입니다. 3일이든, 30년이든, 언젠가 반드시 끝이 옵니다. 그 끝 너머를 바라볼 때, 지금 이 배 속의 쓴맛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어공주의 꼬리가 사람의 다리로 변할 때의 고통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물며 죄로 일그러진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지는 과정에 고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 고통은 파괴의 신호가 아니라 변화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삶이 어렵고 쓰라리거든, 기뻐하십시오. 그것은 그 책을 제대로 받아먹었다는 증거입니다. 입에서만 달고 배 속에는 아무 반응도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걱정할 일입니다.
요한은 천사의 손에서 그 책을 받아 삼켰습니다. 입에서는 달았고, 배에서는 쓰라렸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 그는 명령을 받습니다. "너는 여러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하여야 한다." 쓴맛을 통과한 사람에게, 말씀이 맡겨집니다.
그것이 복음을 받아먹은 자의 삶입니다. 달고도 쓰고, 쓰고도 답니다. 그리고 그 역설 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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