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세기 4:6~7)
우리는 누구나 성경을 읽다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아벨의 편에 두곤 합니다. 착하고 정직하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더 많이 닮은 이는 아벨이 아니라 가인입니다. 가인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형식적으로 보면 신실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는 동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성경은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제물의 내용물이 아닌, 제물 너머의 사람, 곧 ‘가인’ 자체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이 장면은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종종 ‘나의 예배’가 아니라 ‘나’ 자체가 거절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열심, 내 수고, 내 종교적 행동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불편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내가 어떤 것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직면하고 하나님 앞에 나를 ‘내려놓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예배했지만, 하나님 없이 예배했습니다. 그의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자기의 생산물에 대한 자부심, 자기 의로움을 증명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인의 반응은 너무도 인간적입니다. 자신의 제사가 거절당하자 분노하고, 얼굴빛이 변하고, 결국에는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자신의 신앙이 부정당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지 않고, 자신보다 더 인정받는 자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이 모습은 우리 안에도 깊이 박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다른 이의 은혜에 민감하고, 다른 이의 인정에 질투하며,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예배자가 바로 가인의 얼굴입니다.
하나님은 살인을 저지르기 전, 가인에게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장면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죄를 짓기 전, 미리 말씀하시며 돌이키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기회를 거절하고, 죄를 다스리기는커녕 죄에게 사로잡힙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경고이자 은혜의 초대입니다. 죄는 오늘도 문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작은 오해, 작은 분노, 작은 욕망으로부터 슬그머니 들어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죄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살인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표를 주어 보호하십니다. 이는 가인이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 때문입니다. 성경은 살인자조차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윗도, 모세도, 바울도 다 ‘살인자’였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어떠한가?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한 자도 이미 살인자라 하신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나는 과연 죄 없는 자인가?
결국 이 “구원받은 살인자들”은 우리 모두를 향한 복음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가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기 의에 취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은혜 대신 공로를 들이미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제사는 없고, 다만 그분의 피로 덮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벨은 말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그의 언행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브리서 11:4) 아벨은 죽었지만, 여전히 말하고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드린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믿음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피는 땅에서 울부짖었고, 예수님의 피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더 나은 것을 말하는 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누구를 예배하고 있는가?
가인의 길을 걷던 우리를 아벨의 예배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피는 우리를 덮고, 가인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며,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여십니다. 구원받은 살인자듣이 바로, 은혜 아래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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