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창세기 16:13~16)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막연한 말이 아니라, 쪼개진 제물 사이로 하나님 홀로 지나가신 언약의 장면을 눈으로 본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실패와 무능을 전제로, 약속의 성취를 오직 하나님의 책임으로 완성하시겠다는 선언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의 삶은 더 답답해졌습니다. 하늘은 침묵했고, 시간은 흐르기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십 년이 지나도록, 사라는 여전히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거울 속 얼굴은 날마다 늙어가고, 몸은 점점 가능성을 잃어갔습니다. 약속은 분명히 들었지만, 현실은 점점 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때, 사라가 입을 엽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이 말은 단순한 상황 설명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침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마음,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결론이 들어 있습니다.
사라는 악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문화 속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여종을 통해 대를 잇는 것은 관습이었고,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책임감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신앙으로 기다리다 지치면, “이 정도는 내가 해결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 맡긴다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래도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계속하지만, 동시에 보험처럼 다른 길을 준비합니다. 직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말합니다. “그냥 참고 기다리는 게 신앙이지.”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사라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네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도 너를 지켜주지 않아.” “이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선택이야.” 그리고 그때, 우리 곁에는 늘 하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갈은 언제나 손에 잡힐 거리에서 기다립니다.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약속하는 신앙 방식, 하나님 나라의 위로보다, 지금 당장의 안정과 인정, 사랑하고 용서하는 길 대신, 내 자존심을 지켜줄 합리적인 분노입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칠 때, 배가 이미 항구에 와 있었습니다. 너무 정확한 타이밍이었습니다. 마치 “이 길이 맞다”고 증명이라도 해 주듯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조금만 벗어나려고 마음먹는 순간, 길은 너무 쉽게 열립니다. 그래서 더 헷갈립니다. “이렇게 잘 풀리는 걸 보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 아닐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즉각적인 열림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조급증에 걸린 인간에게 마귀가 준비해 둔 하갈일 때가 더 많습니다.
하갈은 곧바로 임신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기다리던 것이 단번에 이루어졌습니다. 아마 그 순간, 세 사람 모두 기뻤을 것입니다. “이게 답이었구나.” “괜히 기다리기만 했어.” “역시 방법은 있는 거였어.”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어떤 선택을 했더니 바로 결과가 나올 때, 기도한 것보다 훨씬 빠른 성공을 거둘 때, 세상적인 방법을 썼는데 마음이 잠시 시원해질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즉각적인 응답은 종종 오래가는 고통의 시작이 됩니다. 이스마엘의 탄생 이후, 그 집에는 평안이 사라졌습니다. 사라는 하갈을 미워했고, 아브라함은 책임을 회피했고, 하갈은 도망쳤습니다. 모두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은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조급해서 선택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타협 하나가 처음에는 유익처럼 보이다가 오래도록 우리를 괴롭히는 영적 이스마엘이 되는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은 제물을 준비하고, 솔개를 쫓아내고, 값비싼 것을 쪼개어 드릴 줄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은 견디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헌신에는 강합니다. 봉사, 헌금, 결단, 희생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믿는 것”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신앙의 핵심이자, 가장 어려운 훈련인 것입니다. 존 칼빈이 말했듯, 믿음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무능을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하갈이 도망쳤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에서 그녀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위로보다 먼저, 해결책보다 먼저, 도망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모르고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그분을 이렇게 부릅니다. “나를 보시는 하나님.” 브엘라헤로이, 나를 감찰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불꽃같은 감찰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디로 도망치려 하는지, 어떤 하갈을 붙들려 하는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성도에게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신앙은 빠르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깊게 만들어지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단한 업적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묻묵히,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사랑하고, 용서하고, 참고, 기다리는 삶을 원하십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기억하십시오. 브엘라헤로이,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듣고 계신다.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신다." 조급함으로 이스마엘을 낳지 말고, 은혜로 이삭을 기다리십시오. 찬란한 빛은 언제나
가장 깊은 어둠 뒤에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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