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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창세기에 나타난 최초의 이신칭의 - 믿음은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29.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세기 15:1~6)

성경의 대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하나님의 주권, 믿음과 의라는 소주제들을 통해 설명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창세기 15장은, 그중에서도 복음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이신칭의’가 최초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이 한 문장은 이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종교개혁을 관통하는 복음의 선언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인간의 결단이나 신앙적 결심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그렇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인간 안에서 생산되는 종교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던 갈대아 우르의 사람이었고, 창세기 11장까지 등장하는 불가능한 인간의 전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고 만족시키려는 인간의 대표가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나갔다.” 이 말은 아브라함 안에 이미 믿음이 있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르심 자체가 믿음의 시작이었음을 뜻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내적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외적 개입입니다.

창세기 15장은 아브라함의 두려움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동방 연합군과의 전쟁 이후 불안해했고, 약속된 후손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보복,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현실의 공허함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두려움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전쟁의 본질을 다시 가르치십니다. 아브라함이 치른 전쟁은 그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승리는 그의 전략이나 용맹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패 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전리품은 세상의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싸움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서 끝난 하나님의 전쟁을 삶 속에서 실재화하는 여정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
저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십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여기서 성경은 의도적으로 ‘자손’(제라)이라는 단수를 사용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 의미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 자손은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단순한 다산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통해 오게 될 한 분,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죄를 이기고 의를 완성하실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인간의 열심은 항상 방해물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그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보태려 합니다. 롯을 붙들고, 엘리에셀을 후사로 세우고, 결국 이스마엘까지 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제거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내어놓는 모든 것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구원을 가리는 장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말씀하십니다. “
그것은 네가 낳은 것이 아니다.” “내가 할 것이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까요? 바울은 단호히 말합니다. “
그럴 수 없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이미 자신의 결국을 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 소망은 우리를 자기 부인의 길, 순종의 싸움으로 이끕니다. 이 싸움은 나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죽고 하나님이 사시는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삶에 무거운 짐을 지우십니다. 그러나 그 짐은 벌이 아니라 교정 도구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쇠붙이를 다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한 의인의 형상으로 빚기 위해 고난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결국을 본 사람이라면, 그 짐은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참 생명으로 이끄는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이신칭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의는 하나님이 완성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끝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열심히 죽는 것입니다. 내 열심을 내려놓고, 내 가능성을 포기하고, 내가 아닌 하나님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참된 자유가 있고, 그 자리에 참된 기쁨이 있으며, 그 자리에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