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더라”(창세기 15:17)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믿음을 “의심 없이 굳게 신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릴 때면 스스로를 책망합니다.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 “왜 이렇게 확신이 없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늘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 6절에서 분명히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이신칭의의 대표적 본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바로 다음 절에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묻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8)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또 증거를 요구합니다.
이 모습이 과연 ‘믿음’일까요? 만약 믿음이 사람 안에서 생산되는 확고한 신뢰라면, 아브라함은 이미 탈락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깊이, 더 구체적으로 언약을 확증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마주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을 흔히 ‘내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믿음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믿음이란, 고삐를 쥔 분에게 이끌려 가는 것이다.” 말은 내가 걷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고삐에 이끌리고 있는 것입니다.
길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이미 정해진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믿음을 ‘결단’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 끌려 나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부릅니다.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롬 5:21) 은혜는 조언자가 아닙니다. 은혜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은혜는 왕입니다. 통치자입니다. 주도권을 쥔 분입니다.
창세기 11장까지의 인간사는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죄가 왕 노릇했다.”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으며 스스로 왕이 되려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안전과 의미를 만들려 했습니다. 그 결과는 분열과 혼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에서 갑자기 방향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한 사람의 인생에 불가항력적으로 개입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자기 인생’이 아닙니다. 은혜가 그의 삶을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모리아 산으로, 우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끌려갑니다. 이것이 은혜의 왕 노릇인 것입니다.
은혜의 왕 노릇은 실패에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늘 조변석개합니다. 속인다, 도망친다, 의심한다, 실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주도권이 아브라함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화목하게 되었다면, 화목된 지금은 더욱 구원을 받지 않겠느냐.”(롬 5:10) 구원의 시작이 은혜였다면, 완성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놓고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은혜는 끝까지 왕 노릇합니다.
마귀의 공격조차 은혜의 통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마귀의 공격을 막아주시지 않을까?” 사도 바울도 그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사단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사단의 가시조차 은혜의 왕 노릇에 사용하십니다. 바울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틴 루터 역시 평생 사단의 공격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자기 내면의 죄와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이 은혜의 사람의 고백인 것입니다.
나의 실패마저도 은혜의 재료가 됩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실망합니다. “왜 또 이 모양이지?” “왜 이렇게 쉽게 무너질까?”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실패조차도 헛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이 “오, 복된 죄여”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가 선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죄마저도 선용하여 자녀를 성숙시키신다는 고백입니다. 은혜의 왕 노릇은 우리의 의지보다 집요합니다. 우리의 연약함보다 강합니다. 우리의 흔들림보다 깊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요? “우리의 낮은 몸을 변화시켜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게 하신다.”(빌 3:21) 은혜의 목적지는 영화입니다. 완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빚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은혜는 당신의 삶 위에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혹시 요즘 자신의 믿음이 형편없어 보이십니까? 신앙의 표준에 한참 못 미쳐 보이십니까? 괜찮습니다. 당신이 붙들고 있는 믿음보다, 당신을 붙들고 있는 은혜가 훨씬 큽니다. 그 은혜는 오늘도 당신의 고삐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당신을 완성의 자리에 앉히실 것입니다. “내 백성아, 일어나라,
내 은혜가 너의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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