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세기 17:1,19)
창세기 17장은 신앙의 본질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장을 ‘할례 언약’의 장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 장의 핵심은 단순히 어떤 종교적 의식을 명령하신 데 있지 않습니다. 이 장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로 서야 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당신의 백성을 완성해 가시는가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아흔아홉에 하나님은 무려 13년의 침묵 끝에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첫마디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 말씀은 도덕적 완전함을 요구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흠 없는 인격, 실수 없는 삶을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그런 완전함을 이룬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엘 샤다입니다. 이 이름은 “모든 것을 기르고,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인생을 완성하는 분은 너 자신이 아니다. 너의 힘과 꾀가 아니라, 나의 능력과 은혜가 너를 살게 한다.” 그러므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은 ‘강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약한 자로 서라’는 요청입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려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로 서라는 초청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 우리가 약해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무장을 해제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자유롭게 역사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완전함’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자신을 내어맡긴 상태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날카로운 단어는 단 하나입니다.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은 겸손한 기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고집입니다. “하나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내가 최선을 다해 얻은 열매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노력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인간적 성취 앞에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이 말은 잔인한 거절이 아닙니다. 은혜의 선언입니다. 인간의 열심으로 만들어진 것은 결코 언약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완전한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십니다. 그래서 이 장에는 “내가”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내가 언약을 세우겠다.” “내가 너를 번성하게 하겠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 인간의 행복은 인간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작되고, 하나님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주시며 그 표로 할례를 명하십니다. 할례는 생식기의 끝을 자르는 행위입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전인적 고백입니다. “내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내 후손, 내 미래, 내 존재는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는 곧 죽음의 상징입니다. 자기 생산, 자기 의, 자기 욕망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짜 할례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육의 삶을 벗어나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낳습니다. 그러나 그 행함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십니다.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십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소유권의 선언입니다. “너는 이제 내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이름은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를 미리 선포하는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열국의 아버지가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 곧 거룩한 자라 부르십니다. 우리는 아직 부족하고 흔들리지만, 하나님은 그 이름에 맞게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듯, 시몬이 베드로가 되었듯, 교회는 그렇게 이름을 향해 빚어져 갑니다. 그 과정은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험악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험악함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왕자로 길러졌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17장이 향하는 최종 목적지이며,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되는 언약의 결론입니다. 세상에서 번성하고 커지는 것이 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도 큰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 언약은 이삭과 세우리라.” 진짜 복은 언약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는 삶, 그것이 영생이며 참된 행복인 것입니다.
“내 앞에서 행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손을 놓고 지켜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뒤에서 우리를 지키시며 밀어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달릴 수 없지만, 아버지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때, 아버지는 사랑하라 하십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때, 아버지는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끝까지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아버지가 지금도 우리 뒤에서 함께 달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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