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그를 택한 것은 그가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들의 성읍들을 멸하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세기 18:19,29)
성경을 읽을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본문을 떼어내어 읽는 일입니다. 문맥을 잃은 성경 해석은 자주,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창세기 18장 역시 그러합니다. 이 본문은 흔히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장면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중보기도를 열심히 하라.” “의인이 되어야 멸망을 피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깊고, 훨씬 불편한 질문이 이 본문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은 어떤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가?” “구원받은 인간은 결국 무엇을 향해 변해 가는가?”
이 본문은 창세기 18장에서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 뿌리는 창세기 15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시며, 쪼개진 제물 사이를 홀로 지나가십니다. 고대 언약 의식에서 이것은 매우 분명한 메시지였습니다. “이 언약은 네가 지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 언약의 시작도, 유지도, 완성도 전부 나에게 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자기 힘을 신뢰합니다.
16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이스마엘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은 그 선택에 대해 즉각적인 책망 대신, 13년의 침묵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셔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이 ‘완전함’은 도덕적 무결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부인의 완전함, 곧 자기 힘과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신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의미를 ‘할례’라는 구체적 표징으로 가르치십니다. 할례는 쪼개짐의 흔적입니다. 인간은 본래 전부 쪼개져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죽음을 대신 짊어지셨고, 그 결과를 언약 백성에게 전가하셨습니다. 할례는 “너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살렸다”라는 선언입니다.
할례 받은 자의 첫 번째 표징은 나그네를 향한 환대입니다. 창세기 18장 앞부분에서 아브라함은 낯선 나그네들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미덕이 아닙니다. 할례 받은 자의 존재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늘 부족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자원을 지키고, 타인의 것을 빼앗으려 합니다. 타인은 곧 경쟁자이며 위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더 이상 스스로를 구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례 받은 자는 타인을 환대할 수 있습니다. 남의 성공을 빼앗아야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필요를 채워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소돔을 향해 가십니다. 심판입니다.
그때 성경은 아주 인상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주님 앞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은 길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실 수 있습니까?” 이 장면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는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모두 소돔이었습니다. 혼돈과 공허, 욕망과 자기기만 속에서 살아가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더러움을 드러내신 분을 우리는 죽였습니다. 공의라면, 심판이 맞습니다. 그러나 중보자가 서셨습니다.
롯은 의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소돔을 사랑했고, 떠나기를 거부했으며, 구원 이후에도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의인이라 부릅니다. 왜일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롯의 구원은 그의 선택의 결과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중보,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중보를 예표하는 사건입니다. 구원은 언제나 이렇게 일어납니다. 누군가가 대신 서서, 대신 간구하고, 대신 짊어집니다.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작은 중보자들로 부름받았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기술이 아닙니다. 신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된 사람, 하나님의 비밀을 말씀으로 듣는 사람, 자기 생명보다 타인의 구원을 더 무겁게 여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그렇지 않으면 제 이름을 지워 달라”고 기도했고, 바울은 “저주받아도 좋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기도의 결은 십자가와 닮아 있습니다.
중보는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그가 자식과 권속에게 여호와의 도를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이 아니라, 부가 아니라, 경쟁에서 이기는 법이 아니라, 의와 공도를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안 가면 큰일로 여기면서 교회에 안 가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면, 그것은 아이를 소돔에 남겨두는 일입니다.
이 세상이 어두워진 이유는 단순합니다. 모두가 자기만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한쪽에서는 비만을 걱정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굶어 죽습니다. 곡물 창고는 가득한데, 아이들은 진흙을 먹습니다. 문제는 시스템 이전에 인간의 방향성입니다. 이기에서 이타로 돌아서지 않으면, 이 세상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예수는 골고다에서 멈춰 서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삶, 나를 부인하고 타인을 살리는 삶, 그것이 할례 언약 속에 들어온 자의 삶입니다. 그것이 이기에서 이타로 건너온 사람의 표정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롯의 교훈 - 불 가운데서 얻은 구원 (0) | 2026.02.08 |
|---|---|
| 농담으로 여겼더라 (0) | 2026.02.08 |
| 나그네를 대접하는 나그네의 삶 - 할례 받은 자들의 길 (1) | 2026.01.26 |
|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선 약한 자의 길 (0) | 2026.01.19 |
| 기다림을 견디지 못했을 때 태어나는 것들 - 아브라함과 사라, 하갈, 그리고 오늘의 우리 (0) | 2026.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