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세기

나그네를 대접하는 나그네의 삶 - 할례 받은 자들의 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26.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땅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창세기 18:2~5)

한창 더운 정오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늘을 찾아 숨을 고르는 시간, 아브라함은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정오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숨이 턱 막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브라함의 눈앞에 낯선 이 셋이 나타납니다.

그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천사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저 나그네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섭니다. 백 세의 노인이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갑니다.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장 시원한 그늘로 모시고, 가장 좋은 음식으로 대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먹는 동안 아브라함은 서서 시중을 듭니다. 이 장면은 우연히 배치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 그 할례 받은 자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가 이 장면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할례 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의 삶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입니다.

할례는 몸의 표식이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성경에서 할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할례이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될 하나님의
‘쪼개짐’의 언약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 유익을 확보하고, 자기 가능성을 붙드는 삶에서 하나님이 쪼개지듯 개입하셔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 세우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할례 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할 낯선 이, 작은 자, 나그네를 향해 자신의 삶을 열어 놓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는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가진 최선을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구원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열심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종교성이 아니라 자기 부인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나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분, 나그네를 사랑하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향해 마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그네를 외면한 채 드리는 제사를 가증하다고 하십니다. 그 어떤 거룩한 말도, 그 어떤 뜨거운 예배도 사랑이 없으면 소돔과 고모라의 종교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는 나그네 대접의 완성입니다. 하늘에 거처를 두신 한 분이 이 땅에 나그네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볼품이 없었습니다. 힘도 없었습니다. 쓸모 있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롱했고, 이용했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힘의 원리를 좇는 세상은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습니다. 유익이 없으면 버립니다. 쓸모가 없으면 제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버려진 나그네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그네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은 이제 또 다른 나그네가 되어 이 땅을 살아갑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사람은 결국 나그네가 됩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존경받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해받고, 무시당하고, 때로는 비웃음의 대상이 됩니다. 사랑해 주면 약해 보이고, 져 주면 바보 같아 보이고, 용서하면 만만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 나라의 자리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를
“흩어진 나그네”라 부릅니다. 히브리서는 “나그네요 외국인”이라 부릅니다. 나그네를 진심으로 대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나그네가 됩니다. 그리고 그 역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라에게 명년 이맘때에 자식이 생길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라가 장막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묻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그리고 그 비웃음은 기쁨의 웃음으로 바뀝니다. 이삭, ‘웃음’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작게 시작됩니다. 비웃음 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생명으로 완성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힘의 논리를 따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그네를 대접하는 나그네입니까? 할례 받은 자는 십자가의 길로 초대받은 자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삶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삶으로 방향이 바뀐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장막 어귀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아니,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대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할례 받은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할례 받은 아브라함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나그네들의 종이 되어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통해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발까지 씻기는 삶을 살았듯이 우리가 그 자리로 초청된 사람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생각지 않았던 때에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자가의 삶을 잘 살아낸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나그네를 대접하며, 섬겨주며, 사랑하며, 인내하며 잘 살아내십시오. 그렇게 나그네를 섬기는 삶을 살 다가 어느 날 부지불식간에 찾아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대접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