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창세기 25:21)
경상북도 어느 산골 마을에 오래된 사과 농장을 일구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봄이면 어김없이 가지를 치고, 여름이면 솎아내고, 가을이면 수확을 했습니다. 어느 해 봄, 그의 손자가 할아버지 곁에 쭈그리고 앉아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사과나무는 할아버지가 안 돌봐도 혼자 자라지 않아요?" 노인은 잠시 흙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나무는 내가 없어도 자라. 그런데 나는 여기 있어야 해." 손자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노인은 웃으며 덧붙였습니다. "나무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야. 내가 이 나무 곁에 있어야 내가 제대로 자라거든." 이 노인의 말 속에 기도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하신 그 언약이 이삭을 통해 이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마흔 살에 리브가와 결혼하고 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습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어떤 시간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갓난아이가 스무 살 청년이 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 60세가 다 되도록 자녀 하나 없이 기다려야 했던 그 세월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속으로는 매일 밤 무너지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삭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개인의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통해 이어져야 하는데, 왜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이 침묵이 이삭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빚어갔습니다. 마침내 이삭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임신했습니다. 성경은 이 순서를 분명히 밝힙니다. 기도 이후에 잉태가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 앞에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삭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기로 이미 결정하셨다면, 이삭이 기도를 하지 않아도 그 일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인간의 기도 여부에 따라 바꾸신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간청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에스겔서 36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말하자면, '내가 반드시 이룰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기도해야 한다.' 이 두 문장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어느 목수 아버지가 아들에게 집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설계도를 그렸고, 자재도 준비했고, 언제 짓겠다는 날짜도 정해두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함께 짓자." 아들은 망치질을 몇 번 하다가 엉뚱한 곳에 못을 박습니다. 아버지가 슬며시 와서 못을 다시 박아줍니다. 집이 완성되는 날, 아들은 그 집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내가 함께 지은 집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혼자 하셨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의 손을 함께 얹게 해 주셨다는 것도 압니다. 그 집에서 사는 동안 아들은 다른 집에서 사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요구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당신이 계획하신 것을 당신 혼자서도 완성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십니다.
빌립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소원을 심으시고, 그 소원을 기도로 내뱉게 하시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일이 완성되었을 때 우리도 함께 서 있게 하십니다. 면류관을 나누어 씌워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의 표현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2004년 어느 가을, 인도양 쓰나미가 오기 몇 달 전의 일입니다. 스리랑카의 한 작은 교회 공동체가 수개월째 매일 새벽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도 제목은 단순했습니다. "우리 마을에 복음이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해 주소서. 우리가 이웃을 더 잘 섬기게 해 주소서." 기도는 계속되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다 쓰나미가 왔습니다. 그 공동체는 무너진 마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이웃을 섬기는 손이 되었습니다. 기도가 그들을 준비시킨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기도는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손이 될 수 있도록 빚어내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레일을 깔게 하시고 당신의 열차를 달리게 하십니다. 레일이 없으면 열차가 달리지 못하는 것처럼,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삶에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레일을 깔기 때문에 열차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달리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레일을 깔 수 있는 특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은혜입니다.
한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못된 동서 브닌나의 핍박 속에서 수년을 울었습니다. 성경은 브닌나가 한나를 격분시켰다고 기록합니다. 이 어두운 시간이 없었다면 한나의 입에서 그 기도가 나왔을까요? 실로 성막 기둥을 붙들고 통곡하며 드린 그 서원의 기도 "아들을 주시면 그를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는 고통이 빚어낸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사무엘을 낳을 한나를 필요로 하셨습니다. 그 한나를 만들기 위해 브닌나의 핍박과 닫힌 태의 고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때로 우리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가장 세밀한 손길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의 이야기는 이것을 더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다에는 바벨론 유수 이전까지 두 개의 제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제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들인 건강, 재물, 성공을 얻기 위해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이중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마치 오늘날 주일에는 예배당에서 찬송을 부르고, 월요일에는 다시 세상의 논리에 온전히 복종하는 삶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이후 그 두 번째 제단이 사라졌습니다. 고고학적 발굴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무엇이 그 제단을 허물었습니까? 칠십 년의 이방 땅 생활이었습니다. 그 고통과 수치와 기다림이 그들의 입에서 마침내 순수한 기도를 끌어냈습니다. 느헤미야 9장의 그 길고 깊은 참회의 기도를, 조상의 죄까지 자신의 죄처럼 슬퍼하는 그 기도를, 바벨론의 고통이 빚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응답 없는 기다림, 고통스러운 환경, 이것들은 때때로 하늘의 복이 부어지기 직전의 전야제입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이 가장 강렬한 기도를 낳고, 그 기도가 우리 안의 두 번째 제단을 허물어뜨립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을 읽으며 많은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산을 옮기려 했습니다.
어느 기도원의 흔들바위 앞에서 믿음을 쥐어짜며 기도했던 이야기는 지금도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그러나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서 산이 바다에 빠졌다는 보고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청소하시고, 열매 없이 이파리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려 죽이신 직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 자리에서 제자들이 놀라워하자 주님은 '이 산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서 있는 시온 산을 가리킵니다. 성전과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힘과 지혜로 구원에 이르고 행복에 도달하려는 모든 시도를 상징합니다. 이파리만 풍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형식과 외형은 가득하되 생명이 없는 종교적 노력 전체가 '이 산'인 것입니다.
오늘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 산은 무엇일까요? 기복주의입니다. 물질만능주의입니다. 능력지상주의입니다. '씨앗 헌금을 하면 몇 배로 돌려받는다'는 논리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번영이 온다'는 논리입니다. 기적과 신비로운 현상을 좇아 그것을 신앙의 증거로 삼으려는 모든 시도입니다. 요컨대 이 세상의 힘을 이용하여 참 행복에 이르려는 모든 인간적 노력이 바로 율법의 산, 시온 산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이미 그 산을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던 율법의 장벽이 무너졌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당신이 이루신 그 일을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 삶에서도 이루어 가라고 하십니다. 여전히 우리 삶 곳곳에 세워져 있는 그 두 번째 제단들, 율법의 산들을 믿음으로 바다에 던지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세상의 고지에 올라가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는 그 고지에서 내려와, 그 산 자체를 바다로 던지는 사람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 앞에서만 진정으로 무릎을 꿇는다." 기도는 정확히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할 수 있다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없을 때, 내 지혜가 다했을 때, 내 힘이 바닥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시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중에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로 하여금 "아, 하나님께서 하셨구나" 하고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내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나는 내 힘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자리에서 이루어진 일 앞에서, 나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삭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20년의 기다림 끝에 이삭이 드린 기도는 분명 이런 고백을 담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의 가능성은 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기도가 이삭을 자신의 능력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태어났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이 나간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보이지 않는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기적은 때때로 믿음을 위협합니다. 오늘 암이 떨어져 나가는 기적을 경험한 사람은 내일 다시 아프면 신앙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기적을 신앙의 근거로 삼은 사람은 기적이 사라지면 하나님도 사라진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루하루 거룩을 경주하는 사람은, 기적이 없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기적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낙망하지 않는 기다림입니다. 내 간절한 기대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기다림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붙들고 하나님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야베스가 그랬습니다. 그는 '복에 복을 더하시고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를 세상적 번영을 구하는 기도로 읽는 것은 오해입니다. 야베스는 '어머니가 수고로이 낳은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름 속에 이미 힌트가 있습니다. 수고로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수고로이 낳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인, 하나님이 죄인을 택하여 자녀로 완성하시는 그 은혜가 내 삶 속에서 풍성히 확장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야베스의 기도의 본질입니다.
노인이 손자에게 "나무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야. 내가 이 나무 곁에 있어야 내가 제대로 자라거든" 하고 말했던 것처럼 기도는 정확히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홀로 계획하시고 하나님 홀로 완성하십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시므로 그 나라는 반드시 완성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긴 역사의 시간 동안 우리에게 기다림을 허락하시고, 기도를 허락하시고, 동역의 특권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빚어가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과정에서 우리 안의 율법의 산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거처로 지어집니다.
이삭의 20년이 그랬습니다. 한나의 고통이 그랬습니다. 유다의 바벨론 70년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가장 조용하고 가장 깊은 사랑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 삶에 아직 남아 있는 율법의 산을 바다로 던지게 해 주소서.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으로 성숙되게 해 주소서. 슬픔도 눈물도 억지도 없는 그 나라가 내 안에서, 그리고 이 땅에서 어서 완성되게 해 주소서." 그 기도는 반드시, 속히,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루심에 우리의 기도가 함께 얹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그것이 기도라는 이름의 동역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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