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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말씀 묵상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복을 주리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3.

창세기 26장 1~13절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창세기 26:3)


이삭은 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았습니다. 75년을 같은 장막 아래서 살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걸음걸이, 아버지의 말투, 아버지가 새벽마다 무릎 꿇던 자리, 이삭은 그 모든 것을 곁에서 보며 자랐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가 떨리는 손으로 칼을 들어 올리던 그 순간도, 하늘에서 울려 퍼지던 하나님의 음성도 이삭은 직접 들었습니다. 그보다 더 가까이에서 신앙을 배운 사람이 또 있었을까요.

그런데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곡간이 비어가고 우물이 말라붙는 시절이 오자, 이삭은 짐을 꾸렸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습니다. 아버지가 똑같은 상황에서 했던 바로 그것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실수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입니다.

성경이 이삭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 장면을 가장 먼저 배치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는 새로워질 수 없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아무리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아도,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이삭의 이야기는 그 냉정한 사실의 확인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삭이 애굽을 향해 걸어 내려가는 길, 그 끝자락에 그랄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마지막 지점,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애굽 땅이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이삭을 멈추어 세우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거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

벼랑 끝에서 붙잡히는 경험을 해보신 분이 계십니까? 이미 한 발이 허공에 나가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잡아채는 그 느낌, 이삭이 그랄에서 받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길을 잘못 든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가망 없어 보이는 그 자리에 나타나셔서,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언제나 죄"라는 공식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 가면 금방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훗날 야곱에게는 정반대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함께 있겠다." 야곱의 일흔 식솔이 애굽으로 내려가 큰 민족을 이루고 다시 돌아오는 그 긴 여정을 통해, 하나님은 더 깊고 큰 구원의 이야기를 그려 나가실 작정이셨습니다.

선의 기준은 행위의 내용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외과 의사의 메스와 같습니다. 같은 칼날이라도 의사의 손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고, 폭력자의 손에서는 생명을 빼앗는 흉기가 됩니다. 도구 자체가 선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뜻을 따라 사용되느냐가 선악을 결정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머물라 하실 때 머무는 것이 선이고, 하나님이 내려가라 하실 때 내려가는 것이 선입니다. 선의 기준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랄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흉년이 든 땅에서 씨를 뿌린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소출이 백 배였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
백 배'란 단순한 수치가 아닙니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함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성경은 지금 이삭이 거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늘의 풍요가 임한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 중요합니다. 이삭은 거부가 된 후에도 계속해서 그랄 왕과 목자들에게 시기받아 쫓겨 다닙니다. 우물을 팠더니 빼앗기고, 다른 데 팠더니 또 빼앗깁니다. 이것이 복입니까? 성경은 일부러 이 장면을 넣어서 우리에게 소 떼와 양 떼가 많아지는 것이 진짜 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삭이 진정으로 복 받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순간은 따로 있습니다. 브엘세바로 쫓겨 간 이삭이 거기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을 때, 바로 그때 그랄 사람들이 찾아와 고백합니다.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 복의 실체는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어디로 쫓겨 가든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 그것이 복의 본질이었습니다.

모세는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사자를 보내어 가나안 땅의 모든 대적을 물리쳐 줄 것이다. 그 기름지고 넓은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 그러나 나는 함께 가지 않겠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대적이 전부 쫓겨난 땅, 평화롭고 풍요로운 땅, 이것을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모세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는 땅은 아무리 풍요로워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가나안도 사막입니다. 당신이 함께하시면 광야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평생 배운 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리고, 노예가 되고, 억울하게 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감옥 안에서의 삶을 '
형통'이라고 부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이 문장의 강세는 '형통'이 아닙니다. '함께 하심'입니다. 감옥이 형통의 자리가 된 것은 하나님이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까? 예수님이 들려주신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세 종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금 한 달란트는 당시 평균 노동자의 20년 치 임금, 오늘날로 환산하면 수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
한 달란트'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를 흔히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작더라도 열심히 노력해서 결과를 내야 한다." 그러나 이 비유는 업적을 강요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읽으면 분명해집니다. 어떤 부자의 청지기가 있었는데, 그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했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여기서 '허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흩어지게 하다'는 뜻이고, '소유'로 번역된 단어는 재산뿐 아니라 평판과 명성을 포함합니다. 즉 이 종은 주인의 재산을 착복한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과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주인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주인이 품으려 했던 사람들을 오히려 멀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고리대금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당시 기름은 연 백 퍼센트, 밀은 연 이십오 퍼센트의 이자를 받았습니다. 이 종은 주인의 재산을 이웃들에게 빌려주면서 높은 이자를 뜯어 주인의 재산을 불리려 했습니다. 그것이 주인에 대한 충성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인의 이름으로 이웃을 착취하는 일이었습니다. 주인의 평판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종이 해고될 위기에 처하자 비로소 주인의 의중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빚진 자들을 불러 이자를 탕감해 줍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를 칭찬합니다. 원문의 단어는 '
찬양하다'에 해당하는 가장 강한 표현입니다. 주인의 반응은 이것입니다. "맞아, 바로 그거야. 내가 처음부터 원했던 것이 그것이야." 주인이 종에게 원했던 것은 재산 증식이 아니었습니다. 맡겨진 것으로 이웃을 유익하게 하여, 그 이웃들이 주인의 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의 뜻입니다.

어떤 마을에 부유한 농장주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일꾼이 있었는데, 주인이 오랜 여행을 떠나면서 각자에게
"이것으로 마을 사람들을 잘 돌보아라"는 말과 함께 넉넉한 자금을 맡겼습니다. 첫 번째 일꾼은 그 돈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높은 이자의 대출을 해주었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불리는 것이 주인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장부상의 숫자는 늘어났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농장주의 이름만 들어도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일꾼은 그 돈으로 가뭄에 씨앗을 나누어 주고, 아픈 이웃의 병원비를 대신 내주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장부상의 숫자는 줄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농장주의 이름을 들으면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어느 쪽이 칭찬을 받았겠습니까? 주인이 원했던 것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재산이 아니라 관계였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인을 사랑하는 것임을, 두 번째 일꾼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이것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종이 주인의 친구가 되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주인의 뜻을 헤아려 그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뜻은 선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주인이 먼 길 떠나시며 남기신 유일한 명령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정죄받은 것은 은사가 적어서가 아닙니다. 주인의 뜻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인을 엄한 분, 심판하는 분, 결과를 요구하는 분으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 속에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주인의 마음을 모르는 종, 그것이 그의 문제였습니다. 반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이 칭찬받은 것은 수익을 많이 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인이 돌아올 것을 믿었고, 주인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주인 앞에 서는 날을 의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 것, 그것이 충성이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여기서 '참된 것을 하여'로 번역된 헬라어는 '진리를 말하다'는 뜻입니다. 진리조차도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아 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랑 없이 말하는 진리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기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이잖아요"라는 말로 시작되는 모진 말들,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는 상처들입니다. 진리는 맞지만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듣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찌르는 것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방언도, 예언도, 지식도, 산을 옮길 믿음도, 심지어 몸을 불사르는 헌신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는,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길 때 비로소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룹니다.

이삭이 그랄에 머물며 백 배의 소출을 거둔 것은, 순종하는 자에게 하늘의 풍요가 임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눈에 보이는 언어로 그려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풍요의 본질은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어디로 쫓겨 가든, 어떤 우물을 빼앗기든,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 그 자체가 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받은 자에게 주어진 삶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맡겨진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 주인의 뜻을 헤아려 그 뜻대로 사는 것, 진리도 사랑의 그릇에 담아 전하는 것. 그것이 거룩이고, 자기 부인이고, 성숙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복을 주리라." 그 말씀은 이삭에게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짐을 꾸려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우리 모두에게, 벼랑 끝 그랄에서 들려오는 음성입니다. 그 말씀 앞에 멈추어 서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순종의 자리입니다. 사랑합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