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25장 28~34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이더니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한 번은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는데, 에서가 허기진 채 들에서 돌아와서 야곱에게 말하였다. "그 붉은 죽을 좀 빨리 먹자. 배가 고파 죽겠다."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은 먼저, 형이 가진 맏아들의 권리를 나에게 파시오." 에서가 말하였다. "이것 봐라,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 야곱이 말하였다. "나에게 맹세부터 하시오." 그러자 에서가 야곱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판다고 맹세하였다. 야곱이 빵과 팥죽 얼마를 에서에게 주니, 에서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나갔다.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
어떤 노인이 임종을 앞두고 자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는 오래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 놓으며 말했습니다. "이 안에 너희에게 남길 가장 소중한 것이 들어 있다." 자녀들은 기대에 차서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안에는 낡은 편지 한 장뿐이었습니다. 장남이 실망한 기색으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가 이내 손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수십 년 전 아버지가 먼 친척으로부터 받은 토지 양도 증서였습니다. 아무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낡은 상자 속에 잠들어 있던 문서였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땅은 지금 수십억 원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낡은 종이 한 장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거대한 유산이었습니다. 에서가 판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5장의 장면은 단순합니다. 에서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고, 배가 고팠습니다. 야곱은 마침 붉은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한 그릇 달라고 했고, 야곱은 장자권과 바꾸자고 했습니다. 에서는 망설임 없이 거래에 응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나갔습니다. 성경은 이 짧은 장면 뒤에 담담하게 한 줄을 덧붙입니다.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
그런데 우리는 에서를 쉽게 비웃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비슷한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에서에게 장자권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고, 팥죽은 지금 당장 코앞에 놓인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손을 뻗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이자, 마귀가 오래전부터 즐겨 써온 전략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의 이 행동을 '망령되다'고 표현합니다. 그 헬라어 원어 '베벨로스'는 '문지방'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문지방 짓밟듯 밟아버렸다는 것입니다. 발에 밟히는 문지방은 거기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서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그랬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한 번도 그 무게를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랑클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사람은 몸이 약한 사람이 아니라, 내일을 향한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반대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눈앞의 참혹한 현실 너머에 무언가를 붙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전쟁이 끝나면 완성하려 했던 논문이 있었고, 어떤 이는 반드시 다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던 그것이 그들을 살렸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믿음과 소망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이란 지금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인식일 뿐입니다. 진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믿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 안에 우리를 연합시키시어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함께 죽이셨으며, 그 제사가 온전함을 증명하시기 위해 주님을 부활시켜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와 함께 하늘의 영광을 상속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지금 우리 눈앞에 완성체로 펼쳐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실상으로 붙듭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자연스럽게 소망을 만들어냅니다. 아직 가시적으로 완성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주어질 하나님 나라와 우리 몸의 부활을 확신 속에서 기다리는 것이 소망입니다. 로마서 8장 24절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는 것은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소망은 본질적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뗄 수 없습니다. 믿음이 과거에 이미 완성된 구원의 사건을 붙드는 것이라면, 소망은 그 믿음 위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를 향해 손을 뻗는 것입니다. 믿음이 소망을 낳고, 소망은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 유일한 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소망에는 반드시 기다림과 참음이 수반된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여기서 '참음으로'라는 말의 헬라어 전치사 '디'는 단순한 동반이 아니라 '~을 방편으로, ~을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참음을 통과하지 않는 소망은 진짜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편 130편에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모습을 가리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에 비유합니다. 성벽 위에서 밤새 어둠을 지키는 파수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임무는 아침 해가 뜨면 끝납니다. 그는 아침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압니다. 군법이 그렇게 정해져 있고, 해는 언제나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여전히 밤입니다. 차갑고 어둡고 긴 밤입니다. 그 밤을 통과하는 것이 그의 일입니다. 소망을 가진 성도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은 여전히 어둡고 때로는 고단합니다. 그 밤을 통과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수동적인 체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놀랍도록 능동적입니다. 디도서 2장 13절에서 '기다리다'로 번역된 단어는 원어에서 '열심히 고대하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은 하나님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권고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달려간다'고 표현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의 바울은 마치 경주 트랙 위의 선수처럼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그래서 사도들은 이것을 '산 소망', 곧 살아있는 소망이라 불렀습니다 (벧전 1:3). 소망은 고요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온 힘을 다해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다림의 시간에 성도가 향해 달려가야 할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베드로후서 3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에베소서 1장 4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은 간결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성도의 유일한 목적지는 거룩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완벽함을 스스로 성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거룩함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고 전진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진짜 소망을 가진 사람은 그 소망이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소망은 방향을 바꾸는 힘입니다.
16세기 스위스 제네바는 존 칼빈의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서 종교개혁의 신학이 뿌리를 내리면서 한 가지 문화적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시간을 극도로 소중히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도가 이 땅을 체념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늘 소망을 가진 사람일수록 오늘을 더 성실하게, 더 열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정신이 정밀한 시계를 만들어냈고, 스위스는 시계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개혁주의가 소피스트들이나 영지주의자들과 다른 지점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혐오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현실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더 깊이 살아내게 하는 힘입니다.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수십 년을 섬기다 돌아왔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 힘든 곳에서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선교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제가 결국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 있는지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십 년의 고단한 현실을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현실 속에서 더 깊이, 더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소망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성도의 삶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겉으로 보면 근심스럽습니다. 실제로 고단하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억지로 끌어올리는 감정이 아닙니다. 소망이 내부에서 만들어내는 기쁨입니다. 눈을 들어 소망의 나라를 바라볼 때, 지금의 고난이 그 빛 앞에서 상대화되기 시작합니다. 로마서 8장 18절의 바울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땅에서 성도가 기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늘 소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상황이 좋아져서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 그것은 소망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19세기의 전도자 집시 스미스는 성도들에게 이런 도전을 던졌습니다. 기도할 때 자기 발 주위에 분필로 원을 그리고, 이 원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원 밖에 있는 것들이 변하기를 구합니다. 내 상황이 바뀌고, 내 주변 사람들이 바뀌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어 내가 행복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방향이 다릅니다. 내가 변하여 내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 내가 변하여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내가 변하여 내가 속한 공동체가 영향을 받게 되는 것, 그것이 소망이 만들어내는 삶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소망으로 붙들고 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이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팥죽 같은 세상의 것과 그 언약을 맞바꾸지 않습니다.
에서의 문제는 배가 고팠다는 것이 아닙니다. 배고픔은 죄가 아닙니다. 에서의 문제는 배고픔 앞에서 언약의 무게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눈앞의 팥죽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보이지 않는 언약은 감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매일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손짓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조용히 기다립니다. 팥죽은 항상 뜨겁고 향기롭고 지금 당장 배를 채울 수 있습니다. 언약은 언제나 보이지 않고, 그 성취는 더디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은 행위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규칙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이 진짜인지를 아는 사람의 삶의 방향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면, 먹고 입는 것이 조금 부족해도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가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나의 상황과 처지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언약을 붙드는 사람이 진정으로 그 언약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지금 이 현실에서 거룩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부활 소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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