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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말씀 묵상

나그네의 귀향 - 본향을 향한 소망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8.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창세기 25:7~10)

수개월에 걸쳐 아브라함의 생애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그에게 정이 들게 됩니다. 창세기 25장을 펼치는데 이상하게도 서운한 마음이 먼저 밀려왔습니다. 그 파란만장했던 인생이 이제 막을 내리는구나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꺼이 하나님께로 떠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눈에 밟혔습니다. 부럽고 아름다웠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죽음을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기운이 다하여 죽었다"는 표현, 그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영을 포기하다'입니다. 불치병으로 부들부들 떨다가 억지로 눈을 감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제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발적인 귀향의 언어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기꺼이 하나님께로 떠났습니다.

히브리서는 그와 같은 믿음의 선진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은 끝내 그 본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역으로 유학이나 직장을 찾아 떠나면 우리는 늘 흥얼거리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꿈에 본 내 고향이라는 노래였습니다. 길을 걸으면서도, 잠이 들기 전에도, 공부하다 고개를 들 때도 그 멜로디가 입가에 맴돌았습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그 노래를 구슬프게 부를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겠는가,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겠는가 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상하리만치 신앙의 선진들을 자꾸 고향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고향 하란을 떠나 낯선 땅에서 생을 마쳤고, 야곱은 20년 이상 삼촌의 집에서 객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형들의 손에 팔려 애굽에서 죽었고, 모세는 120년 평생 조상의 땅 가나안을 한 번도 밟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은 어린 나이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이국의 궁전에서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며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향을 떠난 사람만이 나그네 인생을 온몸으로 압니다.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혼자 밥을 지어 먹던 날의 그 막막함, 아는 얼굴 하나 없는 거리를 걷던 날의 그 공허함을 아는 사람만이 마음속 빈자리의 깊이를 압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로 그 경험을 주셨습니다. 타향의 그리움을 살아낸 사람만이 그 고향에 대한 사무침을 참 본향을 향한 소망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기 때문에 나그네의 삶을 넉넉히 살아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신앙의 선진들은 하나같이 타향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고위 관료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세상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힘도, 어떤 재산도, 어떤 지위도 본향이 채워주는 참된 만족과 포만감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외국에 이민을 가면 한국에서보다 더 쉽게 교회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낯선 땅에서 도움이 필요해서이기도 하고, 심심함을 달래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휑하니 자리 잡은 공허감 때문입니다. 가방 가득 꿈을 싣고 새로운 땅에 왔는데, 밤이 되면 이유도 없이 허전합니다. 그 공허는 돈이나 성공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확고한 소망을 붙든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향년 175세라는 기록은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인생의 날들이 정해져 있다"는 선언입니다. 누구도 이 땅에서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을 통과할 때 돌아갈 본향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서 "생각건대"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조마이'는 막연한 상상이 아닙니다. 배우고 경험하고 익혀서 도달한 확고한 이론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그는 14년 전 낙원에 올라갔다 온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실제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두 눈으로 보고 온 사람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현세가 고난으로 점철된 세대라면, 오는 세대는 영광으로 가득 찬 세대다." 게다가 그 나라는 이미 창세 전에 완성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창세로부터"로 번역된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는 "시간과 공간이 창조될 때 이미 준비되어 있던"이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먼 훗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확실하게 존재합니다.

찰나에 불과한 이 현세가 끝날 때 우리를 기다리는 영원이 있습니다. 영원히 이어지는 그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사랑만 하며 살게 될 것이라는 확신, 바로 그것이 바울로 하여금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이기게 한 힘이었습니다.

이 본향의 소망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있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당시 세리는 월급이 아니라 거둔 세금의 커미션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많이 뜯어낼수록 자기 몫이 커지는 구조였으니, 세리들이 백성들의 사정을 봐줄 리가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세리들의 대장이었습니다. 아랫 세리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백성들의 것을 착복하여 재산을 불렸습니다. 성경이 일부러 "
그는 부자라"고 밝히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이 긁어모았는지를 암시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 공허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창고에 곡식이 넘쳐나도, 금고에 돈이 쌓여도, 밤이 되면 허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가 여리고에 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는 뭔가에 이끌리듯 거리로 나갔습니다. 키가 작아 군중 너머로 예수를 볼 수 없자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이 나무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체면을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 랍비라면 자신의 공허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주님이 그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셨습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날 그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후 삭개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전부를 말해줍니다.
"주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율법은 강탈한 경우 원금에 25%를 더해 배상하도록 규정합니다. 삭개오는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데 스스로 400%를 갚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자기 재산의 절반을 이미 가난한 이들에게 내준 뒤의 이야기입니다. 계산해 보면 삭개오에게 남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상 알거지가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를 만나 오는 세대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된 사람에게는 그때까지 목숨처럼 여기던 이 세상의 것들이 초개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돈 자체가 좋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이 주는 안전함과 만족과 포만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보니 그 모든 것이 훨씬 더 큰 원천에서 공급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돈이 그것을 대신해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돈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주는 안전감, 만족감, 평안, 풍요로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돈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라면 은행에서 하루 종일 돈을 세는 직원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돈이 만들어내는 결과이지, 돈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를 더 확실하고 더 영구적인 방식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돈에 목매지 않아도 됩니다.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것에 너무 깊이 몰두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수만 명이 운집한 자리에서 주님은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 목소리가 군중 위로 퍼져나가는데, 뜬금없이 한 청년이 손을 듭니다. "선생님, 제 형이 유산을 착복했습니다. 찾아주십시오."

성경이 이 장면을 여기에 삽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 청년의 탐욕을 질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유산에 온 마음을 빼앗긴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연속극에 빠져 눈물까지 흘리며 화면을 보고 있는 아내에게 남편이 말합니다.
"여보, 나 머리가 너무 아파." 돌아오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래, 약 찾아 먹어." 그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무언가에 깊이 몰두해 있을 때는 정말 중요한 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도 같은 경고입니다. 그 부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창고에 가득 곡식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영혼아,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자."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노후를 위해 저축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돈과 노후 걱정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삶 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멈추어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우리가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때가 언제입니까? 대부분의 경우, 돈이 부족할 때, 자녀가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 사업이 기대만큼 풀리지 않을 때, 남보다 뒤처지는 것 같다고 느낄 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졌다는 것으로,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것으로 깊은 불행을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가난과 실패와 질병 앞에서 극심한 불행을 느끼셨다면, 그때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돈을, 자녀를, 건강을 더 의지하고 살았구나"하고 말입니다.

성도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전과 평안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저들에게는 대체 무엇이 있는 것일까"하고 궁금해하게 만드는 삶입니다. 전도는 그 궁금증에서 시작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위기감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바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섬기고, 재산을 나누고, 기쁨으로 모여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저들이 진짜이고 우리가 가짜인 것은 아닐까?" 오늘날 교회가 그러한 삶의 향기를 세상에 내뿜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마저 본향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힘을 추구하느라 세상과 경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다시 아브라함으로 돌아옵니다. 8절에 아브라함이 "
수가 높고 나이가 많아" 죽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수가 높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사베아'는 단순히 장수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180세를 산 이삭에게도, 70세를 산 다윗에게도, 140세를 산 욥에게도, 130세를 산 여호야다 제사장에게도 똑같이 쓰였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자기 나이에 만족하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삶이었기에 완전하고 만족한 삶이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창세기 25장은 히브리어로 '
와요쎄프'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더하다, 다시 행하다'는 뜻입니다. 그 단어를 살려서 1절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다시 행하였다. 그는 또 한 여자를 취하였다." 사라를 통해 언약 백성을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음에도 하갈을 취했던 그 실수를, 그가 또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는 날까지 실수투성이였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했던 존재였습니다. 단어 하나가 그 사실을 낱낱이 드러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
사베아', 만족한 삶이었습니다. 그의 인격이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실수 속에서도, 넘어짐 속에서도 본향을 향한 소망으로 다시 일어서는 삶, 그것이 만족한 삶입니다. 이것이 소망 있는 자들의 안전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선 시점부터 정확히 100년 후에 그의 인생이 끝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
사베아'라는 단어와 '100'이라는 완전수는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시작되어, 하나님의 계획대로 마무리된 삶이라는 뜻입니다.

목사는 여러 사람의 임종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돈을 더 벌었어야 했는데, 더 신나게 놀 걸, 더 유명해졌어야 했는데"하고 떠나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성실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남의 가슴 아프게 하지 말고 살았어야 했는데." 이 세상의 것들은 그만큼 덧없습니다. 마지막 순간,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반면 어떤 죽음은 아름답습니다. 병상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고, 자녀들에게
"이제 가도 된다, 아버지 계신 곳으로 간다"고 말하며 눈을 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비참하지 않습니다. 귀향하는 사람의 얼굴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우리의 꿈과 소원을 이루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도 당신의 뜻을 접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좇아 사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뜻과 꿈이 자꾸 막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성도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돌아갈 그 나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바로 이 나라를 소망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그리고 본향을 향한 소망 속에서 참된 안전과 만족과 평안을 얻으십시오. 돈이 주는 안전감보다 신앙이 주는 안전감이 더 크고, 명예가 주는 만족감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감이 더 크다는 것을 삶으로 증명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되 이 세상에 뿌리 내리지 않는 사람, 장막을 치고 살면서도 본향을 그리워하는 사람, 그것이 아브라함이었고, 그것이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실수 속에서도, 넘어짐 속에서도, 끝내 본향을 향한 소망으로 다시 일어서며 살다가, 마침내 기꺼이 영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떠났습니다. 달려갈 길을 다 마친 사람의 퇴장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향을 그리워하십시오. 꿈에라도 그리워하십시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브리서 11:1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