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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말씀 묵상

하나님의 선택과 장자들의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13.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창세기 25:34)

사막 지대를 여행하다 보면 종종 이런 경험을 한다고 합니다. 아침에 출발할 때는 멀쩡하던 사람이 한낮의 뙤약볕 아래 몇 시간을 걷고 나면,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는 것입니다. 배낭 속에 있는 귀중품도, 주머니 속의 지갑도, 심지어 자신의 이름과 목적지도 희미해집니다. 오직 하나만 선명해집니다. 지금 당장 한 모금의 물, 한 조각의 빵,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이 그 빵 한 조각과 같은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에서가 바로 그랬습니다. 들에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내가 죽겠다"고 소리쳤습니다. 물론 과장이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누구나 그런 소리를 합니다. 하지만 그 과장 속에 에서의 전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의 허기를 달래는 것이,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온 언약의 장자권보다 더 긴급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떡과 팥죽 한 그릇을 받고, 먹고, 마시고, 일어나 나갔습니다.

성경은 그 뒷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경홀히 여겼다는 것은 무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욕구보다 덜 중요하다고 느꼈을 뿐입니다. 그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아는 것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조금 더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삭은 마흔 살에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잉태를 하지 못했습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 5년이 지났습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20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이삭의 귀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전해준 하나님의 약속이 끊임없이 울렸을 것입니다.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 그 약속을 들었던 모리아 산의 기억도 생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오래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이삭 개인의 인내를 시험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으셨습니다. 약속의 씨는 인간의 능력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언약의 후손이 태어날 때마다, 그것은 반드시 인간의 불가능함을 통과한 다음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사라의 불임, 리브가의 불임, 그리고 나중에는 라헬의 불임, 이 반복되는 패턴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성취가 인간의 어떤 조건이나 공로나 열심에 기대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모든 세대에게 각인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네 씨에게"라고 하셨을 때, 그 씨는 복수가 아닌 단수였습니다. 그 씨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이삭과 야곱을 통해 이어진 언약의 선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교회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탄생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 역시 인간의 어떤 공로나 자격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부터 반복하여 그려 보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20년의 기다림 끝에 리브가가 잉태했습니다. 그런데 태중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두 아이가 서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가 하나님께 나아가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 말씀의 무게를 생각해 보십시오. 두 아이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선을 행한 적도 없고, 악을 행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누가 선택된 자이고 누가 아닌지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것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 대목에서 많은 분들이 불편함을 느끼십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꼭두각시입니까? 하나님이 결정하신 대로 살다가,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버려지는 것입니까? 그게 공평합니까?" 그 질문 자체가 사실 많은 것을 드러내줍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갖고 싶어 합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자격을 갖추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이것은 냉혹한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안도의 근거입니다. 만약 구원이 내 자격과 노력에 달려 있다면, 나는 영원히 불안해야 합니다. 내가 충분히 선했는지, 충분히 믿었는지, 충분히 헌신했는지를 끊임없이 검증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에 달려 있다면, 그 구원은 나의 흔들리는 상태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은, 그릇이 아무리 흔들려도 토기장이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이삭과 리브가조차 그 주권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이삭은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졌을 때, 에서를 불러 사냥해 온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면 죽기 전에 장자의 축복을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은 담담하게 말합니다.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항상 즐겼으므로." 하나님의 언약이 맛있는 고기 앞에서 흔들린 것입니다.

리브가는 또 어떻습니까? 그녀는 분명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셨다는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만히 기다렸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남편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는 재빠르게 계획을 짰습니다. 야곱에게 형의 옷을 입히고, 손에 염소 가죽을 감아 에서처럼 보이게 만들어 눈먼 이삭에게 보냈습니다. 속임수로 하나님의 언약을 앞당기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불신앙이었습니다. 리브가가 그 수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장자권은 야곱에게 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계략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임수로 인해 야곱은 평생을 도망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불신앙의 대가는 언제나 불필요한 고통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 모든 인간의 방해와 실수와 불신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빗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의 편애도, 리브가의 꾀도, 야곱의 비겁함도, 에서의 분노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정하신 선택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야곱은 그 파란만장한 삶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이 진리를 온전히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는 말년에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 오른손을 장자 므낫세가 아닌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었습니다. 요셉이 바로잡으려 하자 야곱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출생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과 에서 사이에서 일어났던 그 일이, 지금 자기 손자들에게서 다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야곱이 속임수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여, 눈을 감고 손을 엇갈렸습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장자권의 이야기는 한 가족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한 민족의 이야기로 확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당신의 장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였습니까? 더 강해서였습니까? 더 도덕적이었습니까?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아무런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마음대로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의 모형으로 택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 진짜 장자들은 누구입니까? 히브리서 12장은 말합니다.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 구원받은 성도가 바로 하나님의 장자들입니다. 어떻게요? 자신들의 노력과 공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전가받아 공짜로 장자가 된 것입니다.

이 진리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출애굽의 유월절 밤입니다. 그날 밤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살아남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인방과 문설주에 발려 있는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그 피를 바르지 않은 집의 장자는 죽었습니다. 그 피를 의지한 이방인은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중다한 잡족"이 함께 나왔습니다. 장자들의 정체성은 혈통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에 있었습니다. 그 어린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에베소서 1장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리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
장자'인 것은 장자가 아버지의 기업을 온전히 상속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법에는 흥미로운 규정이 있었습니다. 적자(嫡子)에게는 유산 상속의 의무가 없었지만, 양자(養子)에게는 반드시 법적으로 유산을 상속해야 했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
양자'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당신의 나라를 상속할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아들'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성별의 구분이 아니라 상속의 필연성을 담은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모든 풍요와 평안과 안식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그 장자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종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린 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얻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모함을 받아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또다시 어린 자의 자리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그는 제반 사무를 맡았습니다. 마침내 바로 앞에 섰을 때, 그는 애굽 전체의 역사를 좌우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온 야곱이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세상 권세의 상징인 바로 앞에 선 야곱은 초라한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야곱이 바로를 축복합니다. 축복하는 자가 우위에 있습니다. 어린 자가 큰 자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가 그 순간 드러납니다.

역대상 5장은 이것을 간명하게 정리합니다.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정치적 주권은 유다에게 갔지만, 장자권은 내내 버림받고 고난당한 막내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 모든 고난과 억울함 속에서 분노하지 않고 끝내 형들을 용서하고 끌어안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왔을까요?

야곱은 임종 직전에 요셉을 축복하면서 그 비밀을 말해줍니다.
"야곱의 전능자의 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 되신 목자로부터 요셉의 힘이 나온다." 요셉의 인내와 사랑과 섬김은 그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온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 환도뼈를 맞아 절름발이가 된 것처럼, 우리도 여전히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욕심이 우리를 미혹하고, 두려움이 우리를 흔듭니다. 그러나 내 안에 예수가 사시기에, 그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가 장자의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에서의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자권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소중하다는 것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
망령됨'이라고 부릅니다. 원어 '베벨로스'는 '문지방을 짓밟다'에서 온 단어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발로 짓밟았습니다. 그것도 팥죽 한 그릇을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거기서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 보화가 자기의 모든 소유보다 더 값지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장자권을 소유한 자의 태도입니다. 설령 가진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이 보화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분명한 사람이 성도입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이 조금만 유혹해도 성도다운 삶을 놓아버린다면, 그것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파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가 바로 이들입니다. 환난이 닥치면 넘어지고,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오면 말씀이 막혀버리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 유혹은 여전합니다. 하늘 소망 대신 현세의 복을 약속하는 설교, 십자가 대신 성공을 내세우는 신앙, 팥죽을 약속하는 교회는 늘 크게 부흥합니다. 사람들이 하늘 소망보다 눈에 보이는 팥죽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장자권을 문지방 짓밟듯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신 것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였습니다.
"내 아들을 보내어 나를 섬기게 하라." 세상의 힘을 쏟아부어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장자들을 세상으로부터 건져내어 아버지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지파를 세우셨습니다. 레위지파는 땅도 없었고 재산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장자들의 대표였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으로 기뻐하고, 그것이 너무 좋아서 팥죽은 물론이요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다는 굳은 신앙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참 성도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장자들은 대개 작은 자의 모습으로 삽니다. 에서처럼 400인의 사병을 거느린 권력자가 아니라, 야곱처럼 쫓겨 다니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요셉처럼 억울하게 팔려가고 모함받는 모습으로, 예수님처럼 버림받고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으로,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그들을 통해 움직였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러니 기죽지 마십시오. 당신에게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장자권이 있습니다. 가진 것이 다 사라진다 해도, 그 장자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붙들린 그릇처럼, 당신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신분이고, 당신의 소망이며, 당신의 승리입니다. 팥죽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당신의 장자권을 굳게 지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