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그 해에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부자가 되었다. 재산이 점점 늘어서, 아주 부유하게 되었다."(창세기 26:12~13)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는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두 골을 터뜨렸습니다. 첫 번째 골은 훗날 '신의 손'이라 불리게 되는 핸드볼 골이었고, 두 번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로 꼽히는 개인 돌파 골이었습니다. 경기 후 기자들이 첫 번째 골에 대해 묻자 마라도나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마라도나의 머리와 하나님의 손으로 넣은 골입니다." 세상은 그 말을 그의 재치 있는 변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어쩌면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영광을 높이려는 욕망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종종 그분을 자신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 합니다. 신앙생활이 잘 되면 사업이 번창하고, 건강이 유지되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삶이 형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삭의 이야기는 불편한 진실을 건네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아들은 이삭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흉년이 찾아옵니다. 그것도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이어 두 번째로 찾아온 흉년이었습니다. 창세기 26장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또'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립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에게, 왜 하필 또 흉년입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의 삶에 왜 흉년이 허락되는 것입니까?
이삭은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붙드셨습니다.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 이삭은 순종하여 블레셋 땅 그랄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또 다른 시험에 무너집니다. 그랄 사람들이 아내 리브가를 탐낼까 두려워 그녀를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그것도 아버지 아브라함이 똑같은 방식으로 실패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실패했습니다. 결국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들통이 나서 호된 꾸중을 듣고 맙니다.
약속의 자손이 이방 왕에게 야단을 맞는 이 장면은, 성경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민망한 장면입니다. 언약의 후손이,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임금 앞에서 이렇게 비굴하게 거짓말을 하고 망신을 당하다니.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최종 목적입니까, 아니면 어떤 목적지를 향한 과정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종착점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믿어서 천국 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43장 7절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에스겔서 36장 22절은 더욱 직접적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더럽힌 나의 이름을 위해 너희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출발점입니다. 목적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답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사랑하고, 이유 없이 인내하고, 욕을 먹어도 온유를 잃지 않고, 배신당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 그 모든 것이 하늘의 삶의 원리가 이 땅에서 드러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이것을 죄의 본질로 규정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 품는 모든 생각과 행위입니다.
1세기 로마는 자랑의 문화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저마다 '레스 게스타이'라는 자기 이력서를 들고 다녔습니다. 자신의 업적, 지위, 훌륭한 경력이 빼곡히 적힌 그 문서는 오늘날의 링크드인 프로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문화가 교회 안으로 침투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믿음으로 얻은 세상의 성공을 자신들의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벌써 배가 불렀고, 부자가 되었으며, 왕처럼 다스리는" 삶을 신앙의 열매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되, 결국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했습니다. 오늘날의 번영신학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꺼내 보입니다. "우리는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으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나를 본받으십시오." 샘이 나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은 고생하는데 자신이 개척한 교회의 성도들이 잘 사는 것에 대한 볼멘소리가 아닙니다. 바울은 진심으로, 자신의 그 처참한 삶이야말로 성도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과 12장에서 바울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다섯 번의 태형, 세 번의 태장, 돌에 맞음, 세 번의 파선, 강도의 위험, 거짓 형제들의 배신, 굶주림과 추위와 헐벗음, 이것이 그의 이력서입니다. 그리고 30절에서 그는 선언합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여기서 '부득불'로 번역된 헬라어 '데이'는 곧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당위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은 바울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습니다.
12장에서 바울은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 말할 수 없는 신비를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체험 때문에 자신이 교만해질까 봐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단의 가시'를 자랑합니다. 여기서 '가시'로 번역된 헬라어 '스콜롭스'는 고대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1미터가 넘는 뾰족한 꼬챙이로 옆구리를 관통시켜 끌고 다니던 고문 도구를 가리킵니다. 바울의 가시가 그만큼 극렬한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은 가시를 없애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가시의 목적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목적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을 관통하는 고문 도구를 기뻐하며 자랑하게 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것은 역설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역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에 대한 가장 정직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강함과 번영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자들을 통해, 그 안에서 일하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19세기 영국에 찰스 스펄전이라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수천 명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들었고, 그의 설교집은 오늘날까지도 읽힙니다. 그런데 그는 평생 극심한 우울증과 통풍, 신장 질환에 시달렸습니다. 어떤 해에는 1년 중 3분의 1을 병상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너무 자주 절망의 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진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그는 설교단에 올라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내 고통을 통해 비로소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부수심으로 나를 통해 부서진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스펄전의 약함은 그의 사역의 걸림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일하시는 통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시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는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배움이 그의 설교를 단순한 웅변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삭은 흉년을 겪으며 세상의 물질이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그랄 왕 앞에서 아내를 팔아넘기려 했던 자신의 비겁함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를 배웠습니다.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파놓은 우물마저 빼앗기는 나그네의 삶을 통해, 자신의 힘과 재산이 아닌 하나님만이 진정한 방패이심을 배웠습니다.
그 모든 배움이 쌓인 끝에, 이삭은 브엘세바로 올라가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거부가 되어서 쌓은 단이 아니었습니다. 흉년과 두려움과 비굴함과 망신과 쫓김을 모두 통과한 끝에 쌓은 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단 앞에서 이삭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 하나님은 이삭의 강함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의 약함이 완전히 드러난 그 자리에 나타나셨습니다.
아름다운 발을 가진 발레리나가 있습니다. 반면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은 보는 이를 움찔하게 만듭니다. 굳은살과 변형과 상처로 뒤덮인 그 발은, 발레리나의 발이라기보다 노동자의 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발이 무대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녀의 목적이 아름다운 발을 유지하는 것이었다면 그 발은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목적은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었기에, 발이 망가져가는 것을 감수하며 이를 악물고 연습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삶의 목적이 이 세상에서의 편안함과 번영이라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흉년과 시험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맞춰져 있다면, 삶이 만신창이가 된다 할지라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 고통이 하나님이 나를 빚어가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류의 모든 가시를 당신의 머리에 친히 쓰시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가시를 도말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약속된 나라에서는 이 땅이 토해내는 모든 가시와 엉겅퀴가 사라지고, 영원한 안식과 평화만이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잘 참으십시오.
당신의 삶에 허락된 흉년은 당신을 버리신 증거가 아닙니다. 당신의 가시는 당신이 실패한 증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다는, 그리고 당신을 완성해 가신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당신이 약할 그 때에, 하나님이 강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린도후서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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