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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말씀 묵상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주 - 고난은 하나님 임재의 증거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10.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그 해에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창세기 26:12)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십 년을 열심히 일해 모아 둔 전 재산을 한순간에 잃었습니다. 사기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믿었던 사람에게, 그가 평생 쌓아온 것이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그날 밤 그는 빈 통장을 들여다보며 오래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울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멍했습니다.

며칠 뒤 그는 담임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
목사님, 제가 그 돈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었나 봐요. 하나님께서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그 돈을 치워 버리신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 제 삶에 이렇게 깊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게 느껴지니까…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목사님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재산을 잃은 사람이, 기쁘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진심으로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왜 하나님은 약속의 자손에게 흉년을 허락하십니까? 이삭의 이야기가 그 실마리를 줍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도 흉년이 있었고, 이삭 때에도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흉년은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일수록 더 깊고 더 오래된 흉년의 계절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하여 자기 영광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택하신 백성들을 그 안에서 건져내시고,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새롭게 창조해 가십니다. 이 과정에서 성도의 삶에 흉년과 시험이 허락됩니다. 이 세상의 힘을 내려놓고 자기를 부인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
모든 것'입니다. 환난도, 궁핍도, 상실도, 질병도 포함된 모든 것입니다. 바울은 같은 단어를 32절에서 다시 꺼내어 이렇게 씁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분이 어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성도의 삶에 합력하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무게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은 더 직접적입니다.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믿음이 선물이듯, 고난도 선물입니다. 신학자 키드너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시험은 누가 잘 견디는지 점수를 매겨 합격자를 가려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아직 채워지지 않은 부분을 드러내어 채우시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도가니가 은을 정련하고 풀무가 금을 연단하듯,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다듬어 가십니다(잠 17:3).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8~30).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은 뒤로 삶이 더 편안해졌습니까? 한번 비교해 봅시다.

구약의 제6계명은 '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형제를 향해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도 지옥에 보내리라"고 하십니다. 제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율법은 십일조를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미워하라던 율법과 달리,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율법보다 훨씬 더 높고 무거운 요구입니다. 주님이 거짓말쟁이이시거나, 우리가 그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성도에게 약속된 쉼과 자유와 평안은, 상태나 환경에 관한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언어입니다.

주님이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라고 부르시면서, 굳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밝히신 것을 눈여겨보십시오. 그 말씀의 속뜻은 이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내가 너희에게 이 짐을 허락했다면, 반드시 까닭이 있다. 그러니 나를 원망하거나 내가 너희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말라.'

히브리인들의 멍에는 언제나 두 마리의 소가 함께 집니다. 주님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네가 지고 있는 그 짐을 혼자 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지고 있다." 전능하시고 온유하신 분이 함께 지시는 멍에라면, 그것은 반드시 목적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쉼이란, 짐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짐을 함께 지시는 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쉼입니다. 진리가 주는 자유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방종이 아닙니다. 죄에 묶여 죄밖에 지을 수 없던 우리가, 이제 선을 행할 수 있게 된 것이 자유입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윗이 어떻게
"그가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시 23:2)고 노래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울에게 쫓기고,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맨발로 도망하고, 밧세바의 일로 죄책감에 무너졌던 그가, 그는 상황이 편안해서 쉼을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여정 속에서 자신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에, 시편을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고난을 고난으로만 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전도서 기자는 말합니다.
"좋은 날이 다 지나고 '사는 재미가 없구나' 하는 탄식이 나오기 전에, 아직 젊었을 때 너를 지으신 이를 기억하라"(전 12:1). 창조자를 기억하는 것, 그것은 내가 왜 이 땅에 있는지를 묻는 일입니다.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목적은 고난의 무게를 바꾸어 놓습니다. 한 달 안에 이십 파운드를 빼겠다고 결심한 사람과, 억지로 굶겨지는 포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 다 배가 고픕니다. 그러나 전자는 매일 체중계 앞에서 기뻐하며 굶고, 후자는 고통 속에서 굶습니다. 같은 굶주림이지만,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굶주림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오래전 영국 신문에 이런 광고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
위험한 여행에 동참할 사람을 모집합니다. 여러 날 굶주리고,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야 합니다. 잠잘 때도 옷을 모두 입고 텐트에서 자야 합니다. 안전한 귀가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런 여행에 선뜻 나설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광고를 보고 수천 명의 청년이 자원했습니다. 북극 탐험대를 모집하는 광고였기 때문입니다. 북극 탐험이라는 목적이 생기자, 굶주림도 추위도 위험도 더 이상 기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감수할 대가가 되었습니다. 목적이 고난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하와이 모로카이 섬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19세기, 그 섬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격리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벨기에 출신의 가톨릭 신부 다미엔은 그 섬에 자원하여 들어갔고, 이후 16년을 그곳에서 환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매일 환자들의 상처를 씻기고 붕대를 갈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신은 멀쩡한 몸으로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그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들의 고통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옵소서."

12년이 지난 어느 아침이었습니다. 예배당으로 나가던 다미엔 신부는 난로 위의 끓는 물 주전자를 발에 쏟았습니다. 그런데 뜨겁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천히 주전자를 들어 그 안을 확인하고, 다시 자신의 발등에 물을 부어보았습니다. 여전히 뜨겁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알았습니다. 한센병에 감염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으로 달려가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의 한센병 동료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에게 한센병은 분명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자신이 16년간 기도해온 소원을 이루어 주는 응답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는 환자들과 완전히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몸으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센병을 선물이라고 불렀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에게 고난은 고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봄날, 나방이 고치를 뚫고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고치 아래에 바늘구멍만 한 작은 틈이 생깁니다. 도저히 나방이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구멍입니다. 나방은 그 안에서 오랫동안 몸부림을 칩니다.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그 몸부림 속에서 몸통의 성장액이 날개로 흘러들어가고, 날개가 힘을 얻어 마침내 나방은 고치를 찢고 나와 하늘을 납니다.

그런데 그 몸부림이 안타까워서, 누군가 가위로 고치를 잘라주면 어떻게 될까요? 나방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밖으로 나오지만, 날개를 한 번도 펴보지 못하고 곧 죽습니다. 날개로 흘러들어가야 할 성장액이 끝내 채워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치를 쉽게 잘라주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무심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백성으로 완성시키시려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고치 안의 몸부림이 있어야만, 우리는 날 수 있는 날개를 얻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여기서 '
머물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에피스케노는 '장막을 치다, 거하다'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에서 쓰인 바로 그 단어이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계 21:3)에서도 같은 단어가 쓰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기에서 "내가 거할 성소를 지으라"(출 25:8) 하셨을 때, 그 성소가 오늘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하시려면, 우리의 옛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난과 흉년과 시험을 통해 우리의 자기중심적 자아를 끊임없이 죽여 가십니다. 우리의 힘이 강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워질 때, 비로소 그분으로 채워집니다.

처음의 그 교인의 이야기에서 전 재산을 잃은 그가, 기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이렇게 깊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정확한 말입니다. 성도의 삶에 흉년과 시험이 찾아올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셨다는 신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장막을 치시고 거하시기 위해, 우리의 자아를 다듬어 가시는 손길입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 있을 때만큼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씁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베드로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2~13)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고난이 찾아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고난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성도의 삶에는 기쁨과 평화와 아름다운 날도 많이 있습니다. 다만, 고난이 예고 없이 찾아올 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닥뜨리면 무너지기 쉽습니다. 미리 각오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같은 파도를 만날 때, 그 파도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지금 인생의 흉년 속에 계십니까?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고치 안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 곁에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삶이 편안할 때가 아니라 몸부림치고 있을 때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몸부림 속에서 당신의 날개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 고치 안에서, 하나님은 지금 당신 안에 장막을 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