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세기 47:9)
새벽빛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한 남자가 뽕나무 농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 밧줄을 싣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삶은 이미 그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빚, 가난, 끝이 보이지 않는 고단함,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무에 밧줄을 걸려 했지만 걸리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반복하다 결국 나무 위로 직접 올라갔습니다. 그때 손끝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습니다. 체리였습니다. 탐스럽게 익은 체리 한 알, 그는 멍하니 그것을 입에 넣었습니다. 과즙이 터졌습니다. 두 알, 세 알, 그사이 산등성이 너머로 태양이 솟아올랐습니다. 장엄했습니다.
그때 아이들 소리가 들렸습니다. 등교하던 아이들이 나무 위의 그를 발견하고 체리를 흔들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가 나뭇가지를 흔들자 체리가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웃으며 주워 먹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아직 자고 있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내가 그가 가져온 체리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는 자살하러 갔다가 체리를 가지고 돌아온 것입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체리 향기〉에 등장하는 노인의 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노인은 삶을 웅변하지 않았습니다. 극적으로 포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심드렁하게, 빛바랜 사진첩을 넘기듯 중얼거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사내가 죽음의 결심을 내려놓습니다. 체리는 흔한 것이었습니다. 언제든 딸 수 있고, 길가에서도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순간, 체리 한 알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삶이 보내는 눈짓이었고, 아이들과 나누는 소통의 통로였으며, 아직 잠들어 있는 아내와 함께 살아가야 할 날들을 이어주는 고리였습니다. 그것은 일상이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래서 평소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일상이었습니다.
창세기는 야곱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인간의 가장 오래된 질병을 해부합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았습니다. 이름의 뜻 그대로 '속이는 자'였습니다. 그는 명민했고 계산이 빨랐으며 원하는 것을 반드시 손에 넣고야 마는 집요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샀고, 눈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한 그 장면에서 야곱은 형 에서의 옷을 입고, 염소 가죽을 손에 감고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네가 정말 에서냐?" 아버지의 물음에 그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얻어낸 축복의 말은 찬란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그러나 그 축복을 받은 야곱의 이후 인생은 어떠했습니까? 형의 분노를 피해 도망자가 되었고, 외삼촌 라반에게 스무 해를 속으며 살았습니다. 두 아내 사이에서 집안은 끊임없이 갈등했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었으며,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알거지가 되어 애굽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 바로 앞에 선 백삼십 살의 야곱은 자신의 생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축복을 받은 사람이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모순입니까?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복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순탄한 번영, 남들보다 높은 자리, 채워지는 곳간, 그런 것들이 복이라면, 야곱의 이야기는 실패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자신의 배만을 위해 속이고 사기치던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주어진 일상에 감사하는 자로 변화되는 것, 그 성숙의 과정 전체가 바로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하신 복의 실체였습니다.
야곱이 험악한 삶을 산 까닭은 단순합니다. 그는 일상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대신, 끊임없이 더 높은 곳을 향해 자신의 꾀와 사기와 권모술수를 동원했습니다. 그 삶은 겉으로는 영리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자신을 갈아먹는 삶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야곱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놀라운 방식으로 야곱의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이사야는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무덤 사이로 다니며 죽은 자의 영들에게 묻고, 돼지고기를 먹는다"고 말합니다(사 65:4). 열왕기상 18장에서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팔백오십 명이 갈멜 산에서 자기 몸을 칼과 창으로 찔러가며 우상에게 매달립니다. 응답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날뛰다가 결국 몰살당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5장에 이 두 장면을 하나로 합쳐놓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거라사의 광인입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했습니다. 쇠사슬로도 묶을 수 없는 괴력을 지녔지만, 그 힘으로 자기 자신을 파괴할 뿐이었습니다. 마침 그 근처 산 기슭에는 돼지 떼 약 이천 마리가 먹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광인 안의 귀신을 꾸짖으시자, 귀신들이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갔고 돼지들은 비탈을 달려 바다에 빠져 몰사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무덤 사이에 거하며 자기 몸을 상하는 것이 험악한 삶의 본질입니다. 야곱은 평생 자신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부정하다 하신 것, 즉 세상의 힘과 우상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아 달려갔지만, 그 힘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와 상처를 냈습니다. 도망자의 삶, 속고 속이는 삶,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삶, 그는 벌거벗은 채 무덤 사이를 배회하면서도 자신이 그러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에베소서는 이 상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세상의 힘을 우선으로 삼아 사는 것, 그것이 곧 귀신에 속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더 간결하게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마을 사람들은 광인이 고침 받은 것을 보고도 예수께 떠나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왜그랬을까요? 귀신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돼지 떼가 사라진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귀신과 함께 살 때는 불편하긴 해도 재산에 손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시자 그들의 소유가 일시에 날아갔습니다. 그들은 귀신보다 재산이 더 소중했습니다. 맘몬과 하나님 사이에서, 그들은 맘몬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번영신학의 결론이며, 세상의 힘을 우선으로 삼는 모든 삶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셨습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몰살시키셨습니다.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을 돼지 떼에 넣어 바다로 몰아넣으셨습니다. 막강한 군대가 물에 빠져 사라지는 이 장면은 성경 안에서 집요하게 반복됩니다. 그것은 같은 이야기를 다른 시대에 다시 들려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사실 물에 빠져 죽었어야 할 것은 애굽 군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라사 광인도, 야곱도, 그들 역시 저주의 바다에 빠져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모세 안에, 주님 안에 넣으셔서 누군가를 대신 죽이시고 그들을 살려내셨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이것을 '세례'라 부릅니다(고전 10:1~2).
얍복 강가의 야곱도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쳤을 때, 히브리 사람들에게 환도뼈는 인간 전존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순간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입니다.
복음서의 모든 기적 앞에는 십자가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뜰 때, 혈루증 여인이 나을 때, 삼십팔 년 병자가 일어날 때, 주님은 그들의 사망을 당신이 취하시고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거라사에서 귀신들이 돼지 떼와 함께 바다에 몰사한 것도 그 생략된 십자가의 예표였습니다. D-day는 이미 왔습니다. 마귀의 세력은 아직 시퍼렇게 살아 우리를 미혹하지만, 그 결국은 이미 골고다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는 종국의 V-day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소아마비로 장애를 가진 목사님의 전화였습니다. 단순한 안부 전화였는데, 그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애를 가진 목사님에게 자신이 요즘 힘겨워하는 것들을 꺼내놓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전화기 너머가 조용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내 통곡이 되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목사님은 후배가 자신이 지나온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가슴 아파서였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떼를 쓰셨습니다. 작은 교회를 떠나 큰 교회로 가게 해달라고 조르셨습니다. 그는 능력이 충분히 있으신 분이기에, 그 갈망은 더 깊었습니다. 늘 자신의 삶이 부족한 것 같았고,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모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했습니다. 이 장애가, 이 작은 교회가, 이 평범한 일상이, 자신의 거룩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일상이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 간증하셨습니다. 다음 날 장애가 있는 목사님은 30만원을 보내오셨습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큰 도움은 안 될 테지만, 열심히 기도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일상에 순종한다는 것은, 더 높은 곳을 향한 야망을 포기하는 패배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자리가, 이 관계가, 이 한계가, 이 고단함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보다 우위에 앉는 순간, 우리는 야곱이 되고, 무덤 사이를 배회하는 광인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격 있는 자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속이고, 사기치고, 온갖 권모술수를 부리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그 안에서 전쟁을 치르십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시는 그 전쟁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 노인은 죽으러 갔다가 체리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 흔하디흔한 체리 한 알이 한 사람의 생을 돌려세웠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그렇습니다. 지루하고 멀미나고 반복되는 그것들이 때로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셔서 허락하신 것들입니다. 그 일상을 불만과 고통으로 칠하지 마십시오. 신기루 같은 세상의 힘을 쫓다가 정작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를 지배하던 마귀의 세력과 그들이 내미는 온갖 우상들을 저주의 물속으로 밀어 넣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승리 안에 서 있습니다. 일상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리고 그 일상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것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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