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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말씀 묵상

벧엘의 하나님 - 그분은 우리를 쫓아오신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리의 언어가 닿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신학은 오랫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빌려 하나님을 설명하려 했고, 그 작업은 분명 유익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도, 예정론도, 인간의 전적 타락 설도 모두 그 논리의 언어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논리의 잣대만으로 다 읽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역사이면서 동시에 묵시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의 기록이면서, 장차 구속사 안에서 완성될 일들의 예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언제나 네 가지를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인간의 불가능함, 이 네 가지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성경의 어떤 이야기들은 그저 교훈적인 인물 전기로 전락하고 맙니다. 오늘 야곱의 이야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뒤, 형의 칼날 같은 눈빛을 뒤로하고 빈손으로 길을 나선 것입니다. 이 장면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젊은 청년의 방황쯤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때 야곱의 나이는 일흔 일곱이었습니다.

형 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헷 족속의 여인들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도 못 가고, 이제 그 노구를 이끌고 낯선 타지로 홀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자 야곱은 길가에 쓰러지듯 눕습니다. 베개 삼을 것도 없어 돌 하나를 주워 머리에 받칩니다. 차갑고 딱딱한 돌베개, 그의 처지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하는 그림이 있을까요.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야곱이 꿈을 꿉니다. 땅에서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가 놓여 있고,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
나는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지켜 주며,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야곱이 무언가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것도 아닙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아버지와 형을 속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쫓아오십니다. 당신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당신이 창세 전에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를 놓치지 않으시기 위해, 도망치는 야곱의 뒷덜미를 붙잡듯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젊은 날 가산을 탕진하고 먼 이방 땅에서 돼지우리 옆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못해 날마다 길 끝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직 아들이 먼 거리에 있을 때, 아버지가 먼저 달려갑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5장에서 들려주신 그 탕자의 비유가 야곱의 이야기와 겹칩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이기 이전에, 먼저 쫓아오시는 분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는 베개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 이름 붙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곧바로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안전하게 돌아가게 해 주시면, 그러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선뜻 읽으면 경건한 서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래입니다. '
당신이 이것을 해 주면, 나도 이것을 해 드리겠다'는 조건부 협상입니다. 야곱은 방금 전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언을 들었음에도,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갚아야 할 빚으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고, 반드시 자기 몫을 하려는 것, 공짜를 불편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이 그 서원을 지켰다는 기록을 어디에도 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 서원의 내용을 모두 친히 이루어 내십니다.

야곱의 첫 번째 서원은 "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여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민 15:41)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임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두 번째 서원은 성전을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성전을 짓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야곱 자신을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존재로 창조하심으로, 야곱 자신이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제도가 아니라 생명을 지으신 것입니다.

세 번째 서원은 십일조였습니다. 야곱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참 십일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드리심으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길을 여셨습니다.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끝내십니다. 우리가 드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받을 것이 있을 뿐입니다.

20세기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평생 수천 페이지의 교의학을 썼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
그 방대한 신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무엇입니까?" 바르트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성경에 써 있네." 복잡한 신학의 언어를 다 걷어내면, 남는 것은 오직 그분의 사랑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도 다를 바 없습니다.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다리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고, 그 위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사다리입니다. 수백 년이 흐른 뒤, 예수님이 나다나엘이라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야곱의 꿈에 등장한 사다리의 자리에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세우십니다. 사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다리란 무엇입니까? 닿을 수 없는 두 지점을 잇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야곱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을 잇는 것입니다. 그 다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야곱 같이 불가능한 자가 벧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그 사다리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유대인 랍비들은 이 사다리 이야기를 전혀 다르게 읽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은 이미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존재이며, 천사들이 줄을 서서 그의 얼굴을 보러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어좌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선민의식의 발로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해석을 정면으로 뒤집으십니다. 사다리의 주인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몸으로 이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쉽게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스무 해 동안 열 번이나 속으며 혹독한 삶을 견뎌낼 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벧엘로 돌아가라."(창 31:13) 세겜에서 또 다른 위기에 처했을 때도 같은 말씀이 들립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단을 쌓으라."(창 35:1) 벧엘은 지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자리, 그분 앞에 무릎 꿇고 순종하며 예배하는 삶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 한복판에 집어넣으시고, 그들 스스로의 힘과 꾀로 행복에 도달하려 할 때마다 그 길을 막으시며 벧엘을 향해 채근하십니다. 그 채근은 냉혹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라반의 손에 열 번 속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벧엘로 가는 길 위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야곱의 벧엘 여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얍복 강가에서 일어납니다. 이십여 년의 머슴살이 끝에 큰 재산을 이루고 돌아오는 야곱 앞에, 형 에서가 사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야곱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강가에 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람이 야곱과 씨름합니다. 밤새 씨름이 이어집니다. 날이 새도록 야곱은 놓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를 칩니다. 관절이 어긋나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고통 속에서도 매달립니다. "
나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 가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십여 년 전의 야곱은 축복을 훔쳤습니다. 이제 얍복 강가의 야곱은 그것을 구합니다.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에는 자신의 재산과 번영이 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환도뼈가 어긋나고 자아가 무너지자, 비로소 진짜 복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늘의 복은 소유가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와 신분이 새롭게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야곱이 마침내 벧엘로 돌아갑니다. 그가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창 35:4) 자신과 가족이 지니고 있던 이방 신상들, 우상들을 모두 파묻은 것입니다. 벧엘로 돌아간 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상을 파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장 큰 우상은 무엇입니까? 금으로 만든 신상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자기가 파묻힐 때 용서가 나옵니다. 자기가 파묻힐 때 사랑이 나옵니다. 자기가 파묻힐 때 비로소 진정한 섬김이 가능해집니다. 자기가 살아있는 한, 용서는 계산이 되고, 사랑은 조건이 붙으며, 섬김은 보상을 기대합니다.

1948년, 전남 여수에서 반란군에 의해 두 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아들들을 죽인 살인자를 향해 복수를 외치는 대신, 그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손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내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그를 사랑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 돈 몇 푼 빚진 사람은 용서하지 못합니다. 감격에만 머물지 마십시오. 그 감격이 우리의 삶으로 번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사랑의 원자탄이 되어야 합니다.

야곱이 처음 그 돌베개를 베고 쓰러졌던 자리, 그는 거기서 일어나며 말했습니다. "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셨는데,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그것이 벧엘의 발견입니다.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의 발견이 아닙니다. 내가 몰랐을 뿐, 그분은 처음부터 거기 계셨다는 깨달음입니다. 도망치는 나를 쫓아오시고, 차가운 돌베개 곁에 앉아 계시고, 스무 해의 고난 속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않으셨던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사다리 위에 서 계신 분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당신은 이미 벧엘로 돌아오신 분들입니다. 아니,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되셨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서 ''라는 우상을 파묻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십시오. 그것이 벧엘에 사는 사람들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