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창세기 28:1~9)
1992년 가을, 서울 어느 극장에서 한 편의 영화가 조용히 막을 내렸습니다. '달은 해가 꾸는 꿈' 훗날 '올드보이'로 세계를 놀라게 할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이었지만, 흥행은 참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의 주제가 가사만은 오래도록 사람의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우리는 달 아래에서 그게 전부인 양 거기에 꿈을 둡니다. 그러나 달은 실체가 아닙니다. 찬란한 해가 떠오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해가 꾸는 꿈일 뿐입니다.
작사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꿈꾸는 모든 것들, 성공과 행복과 사랑과 의미, 그 모든 것이 달빛 아래의 꿈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고, 마침내 붙들었다 싶은 순간 이미 사그라지는 것들, 해가 뜨면 달이 사라지듯,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날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은 꿈처럼 스러질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그 달빛 아래에서 시작됩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의 눈을 가려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달아나야 했습니다. 분노한 에서를 피해 빈손으로 집을 떠나 밧단아람을 향해 걸어가는 야곱의 뒷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반면 에서는 어떻습니까? 씩씩하고 남자답고, 아버지를 위해 사냥을 나가는 효자였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에서가 훨씬 훌륭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가지 오해를 걷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나쁜 사람을 벌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선과 악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그 단어와 결이 다릅니다.
서울 한복판에 한 의사가 살고 있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가난한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았고, 주말이면 노숙인 쉼터에서 봉사했습니다. 누가 봐도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신앙이란 미개한 사람들의 위안이었습니다.
이 의사의 삶은 선한 것입니까? 세상의 기준으로는 분명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말을 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 강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려면 기독교가 말하는 선의 정의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선이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악이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뜻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행위도, 그 행위가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전기가 끊긴 집에서는 아무리 좋은 전자제품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긴 인간의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의 전원 자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서의 효성과 씩씩함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영적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어려운 질문이 나옵니다. 출애굽기를 읽다 보면 이런 구절을 만납니다.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출 4:21)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직접 완고하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과 몇 장 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바로가 이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출 8:32) 이번엔 바로 자신이 마음을 굳혔다고 합니다. 어느 쪽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시키신 것입니까, 바로가 스스로 한 것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어느 마을에 불량배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을 즐겼습니다. 어느 날 마을 어른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이 마을에서 쫓아내지 않고 두겠다. 그리고 너의 악한 성질을 이 마을 사람들이 단결하는 계기로 삼겠다." 그 불량배는 계속 악을 행했고, 결국 마을 사람들은 하나로 뭉쳤습니다. 이 경우, 마을 어른이 불량배를 악하게 만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이미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을 어른은 다만 그를 제거하지 않고 허용하면서, 그의 악을 더 큰 선을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로의 관계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이 없어도 이미 악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악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를 제거하지 않고 허용하시면서, 그의 완고함을 당신의 구원 역사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과 "바로가 스스로 강퍅하게 했다"는 말이 동시에 맞습니다. 둘은 모순이 아닙니다.
요셉의 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판 것은 분명한 죄였고, 그들은 그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훗날 요셉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형들의 악한 선택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섭리, 이 둘은 서로를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시면서도, 그 모든 것을 당신의 뜻 안에서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죄를 짓지 못하는 존재로 인간을 만들지 않으셨을까요? 결혼한 분들은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부부 싸움이 심해져 한동안 냉전이 이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밥을 차려주고, 빨래를 해주고, 옷을 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말이 없었습니다. 눈길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해주는데, 거기에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때가 결혼 생활 중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시키는 건 다 하는데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관계, 그건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기계와의 계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은 당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로봇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친구를 원하셨습니다. 자녀를 원하셨습니다. 자유로운 인격으로 스스로 사랑하고 순종하는 존재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거절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반역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반역의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역사 전체를 구속의 드라마로 바꾸어 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느 병원의 중환자실에 한 환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심장이 너무 망가져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증자가 나타났고, 수술이 이루어졌습니다. 새 심장이 들어왔습니다. 수술 후 그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새 심장이 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바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새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 마음을 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죄와 악의 세계를 통과하며, 자신이 받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막 7:18)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해진 자들이며, 새 마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는 우리의 본질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아직 벗어내지 못한 옛 사람의 껍질일 뿐입니다.
어떤 교회에 정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술을 좋아하셨습니다. 아니,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었습니다. 알코올이 그분의 삶을 오랫동안 지배했습니다. 주변에서 걱정했고, 가족들은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두 시간을 걸어서 새벽기도에 나오셨습니다. 새벽 어둠 속에서 그 먼 길을 걸어 예배당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가시다 멈추셨습니다. "목사님, 이제 복음이 뭔지 조금 알 것 같아요. 하나님이 저 같은 것도 구원하셨다는 게 기적 같아요." 그리고 며칠 후, 그분은 길에서 넘어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장례식에서 목사님은 "이분이 하나님 품에서 편히 쉬고 계실 것"이라고 말씀드렸을 때, 어떤 분들이 따지셨습니다. "죽는 날까지 술 하나 못 끊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 그게 성화입니까?"
그때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술을 끊는 것이 성화가 아닙니다. 성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 없이는 단 한 순간도 행복할 수 없어요." 이것을 온 가슴으로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 고백으로 하나님의 옷소매를 붙드는 것, 바로 그것이 성화입니다. 성화의 절정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이 아니라, 완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인간입니다. 예수님 옆에 달렸던 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강도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날 저녁, 그는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성화의 목적지입니다.
정 선생님은 술을 끊지 못하셨지만,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면서 자신의 가장 초라하고 나약한 모습과 정직하게 마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약함 속에서 하나님을 붙드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야곱은 베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를 절대로 떠나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 이후에도 야곱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딸이 강간을 당했고, 아들들이 서로 다투었으며,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야곱이었습니다. 두려워하고, 계산하고, 흔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이 생긴 뒤에도, 기도를 시작한 뒤에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야곱이 살고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두려워하고, 넘어지는 야곱, 그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좌절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 좌절의 순간이 바로 배움의 순간입니다. 죄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은혜가 없는 삶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손을 뻗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한 꺼풀씩 야곱이 벗겨지고, 이스라엘이 드러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달빛 아래에 있습니다. 달은 아름답습니다. 빛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해의 빛을 빌려 반짝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 모든 기쁨, 모든 성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본래의 빛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을 잠시 빌려 반짝이는 것들입니다. 해가 뜨면 달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달이 사라진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달이 사라지는 것은 더 큰 빛이 왔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달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동시에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달 너머에 해가 있다는 것을, 이 세상 너머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폭하지 마십시오. 아직 야곱의 껍질이 많이 남아 있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태 속에서부터, 침 삼킬 동안도, 한 순간도 당신을 놓지 않고 계십니다. 반드시 당신을 이스라엘로 세우실 것입니다. 달빛 아래에서 해를 기다리는 자, 그가 바로 야곱의 후손입니다. 그가 바로 우리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에스겔 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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