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창세기 29:31)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종처럼 일한 세월이 7년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이미 여든넷입니다. 그런데도 그 7년이 마치 며칠처럼 짧게 여겨졌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만큼 라헬을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첫날밤을 치르고 아침에 눈을 뜬 야곱의 곁에 누워 있던 여자는 라헬이 아니었습니다. 언니 레아였습니다. 라반의 계략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야곱은 분노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다시 7년을 일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라헬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라헬에게 마음이 갑니다. 사랑받은 여자, 결국 원하는 것을 얻은 여자, 그러나 성경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놀랍게도 사랑받지 못한 여자, 레아입니다.
마태복음 2장을 펼치면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헤롯이 베들레헴의 두 살 미만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처참한 사건 다음에, 마태는 뜬금없이 라헬을 등장시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라마는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 묻힌 곳입니다. 마태는 수백 년 전에 죽은 여인의 무덤에서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왜일까요?
라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요셉의 후손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고, 베냐민은 남유다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히브리 사람들에게 라헬은 곧 이스라엘 전체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 모두 한때 애굽으로 끌려갈 뻔했습니다. 요셉은 실제로 형들에게 팔려 노예로 끌려갔고, 베냐민도 볼모로 잡힐 위기를 넘겼습니다. 훗날 유다 백성 전체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의 예고편이었던 셈입니다.
실제로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끌려가던 길, 다름 아닌 라마에서 사슬이 풀려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마치 라헬의 무덤 곁에서 이스라엘의 징계와 회복이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마태는 이 오래된 이야기의 틀을 그대로 가져와 헤롯의 유아 학살에 입힙니다. 이방 왕 바벨론에게 유다가 끌려갔듯, 이방인 왕 헤롯에게 아이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사망은 죄의 삯이니, 갓난아기들의 죽음조차도 모든 인간이 죄 아래 태어난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니 라헬의 울음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31장 16절은 말합니다.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라헬이 위로받기를 거절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식을 잃은 어미에게 이 세상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힘든 일이 닥치면 우리는 하나님께 조릅니다.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위로받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문제가 해결된다고 진짜 위로가 되던가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이런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업이 회복되고, 병이 나았는데도 여전히 공허해하는 사람들, 반대로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얼굴에 평안이 가득한 사람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위로는 상황의 해결에서 오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 한 분에게서만 옵니다.
성경은 창세기 29장 31절과 33절에서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합니다. "레아에게 총이 없었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마음은 언제나 라헬에게 있었습니다. 창세기 30장을 펼치면 더 노골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캐온 합환채(임신촉진 효과가 있다고 여겨진 식물)를 두고, 라헬과 레아가 흥정을 벌입니다. 레아는 남편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그 귀한 합환채를 라헬에게 내주어야 했습니다. 자기 남편인데도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식 첫 아내인데, 남편과 동침하려면 동생의 허락을 받고 값을 치러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보다 더 서러운 자리가 있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 버림받은 여자의 태에서 약속의 아들 유다를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유다의 후손에서, 다윗을 거쳐,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십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왜 사랑받는 라헬이 아니라 버림받은 레아를 통해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가셨을까요? 답은 이사야 53장에 있습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예수님 자신이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환영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러니 버림받은 레아가 그 메시아를 낳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확한 그림입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보면 이 패턴이 계속 반복됩니다. 며느리 다말은 아들 둘을 잃고 시아버지에게 방치당한 여인이었습니다. 라합은 이방의 창녀였습니다. 룻은 남편과 시아버지를 모두 잃은 모압 과부였습니다. 마리아는 정혼자에게 조용히 버림받을 뻔한 처녀였습니다. 넷 다 세상에게는 환영받지 못한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 그리스도의 계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성경이 이토록 집요하게 버림받은 여인들을 예수님의 족보에 세워놓은 이유는 하나입니다. 복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교회 청년의 부모님 이야기입니다. 그분들은 한때 코스닥 상장사를 열 개 넘게 거느린 대그룹의 회장 내외였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무너졌습니다. 지금은 슈퍼마켓에서 장 볼 돈도 아껴 써야 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땠을까요? 화려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사람들 앞에 나서기조차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달랐습니다. 얼마 안 되는 생활비를 쪼개어 오히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목회자들을 돕고 계셨습니다. 자신들을 무너뜨렸다고 여겼던 돈의 권세 앞에서, 그분들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우리는 생각합니다.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순위를 매깁니다. 어느 시절엔 사업가가, 어느 시절엔 의사와 판검사가, 또 어느 시절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가 최고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순위에 따라 사람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비굴해지고 우쭐해집니다. 그런데 그 순위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시대마다 바뀌는 유행에 불과합니다.
성도는 거기에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권세를 조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이 사람의 목숨까지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하며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 그 사람 앞에서 돈의 권세는 쥐구멍을 찾아 도망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혹시 레아의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까? 애써도 인정받지 못하고, 열심히 해도 알아주는 이 없고, 남들 다 가진 것 같은 사랑과 성공이 유독 나에게만 비껴가는 것 같은 자리, 창세기 30장의 레아처럼, 내 남편인데도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 같은 서러운 처지,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복은 애초에 사람의 사랑이나 세상의 인정과 무관한 곳에서 시작됩니다. 창세기 49장 끝에서,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묻힐 곳을 지정할 때,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아니라 레아 곁에 묻히겠다고 말합니다. 조상들의 무덤,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그 자리에 함께 눕는 것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인간의 사랑을 받은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여인이 결국 그 자리에 선 것입니다. 그러니 가난하다고 기죽지 마십시오. 못 배웠다고 주눅 들지 마십시오. 사업이 무너졌다고, 남들처럼 인정받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매기는 순위표는 그 세상의 것일 뿐,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낳으셨다는 그 믿음 하나만 있다면, 나는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이를 낳는 그 그림은, 바로 총(寵) 없던 레아가 약속의 후손을 낳는 그림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게 당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세상의 권세를 조롱하며 사십시오. 그것이 라헬처럼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레아처럼 사랑받지 못했던 우리 모두를 향한, 이 본문이 건네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이사야 53:3, 표준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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