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세기 27:28~29)
1945년 봄, 네덜란드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의 한 막사 안이었습니다. 코리 텐 붐은 극도의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도 매일 저녁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녀의 언니 베치는 이미 그 수용소에서 숨을 거두었고, 코리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상한 평안을 품고 있었습니다. 훗날 그녀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그 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철조망도 가둘 수 없었습니다." 빼앗길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창세기 27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창세기 27장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당혹감을 안겨주는 본문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부추겨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채며, 속은 줄 모른 아버지는 엉뚱한 아들에게 축복을 퍼붓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장남은 통곡하며 "저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애원합니다. 드라마틱하다 못해 민망하기까지 한 이 장면이 왜 거룩한 성경 안에 담겨 있는 것일까요?
어릴 적 이 본문을 읽으며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품게 됩니다. 첫째, 속여서 빼앗은 축복이 과연 효력이 있는 것일까? 둘째, 만약 그 축복이 원래 에서의 것이었다면 왜 이삭은 취소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을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이 두 질문이 애초에 성경이 관심을 두는 질문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통해 전혀 다른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지 못하는 인간의 민낯을 보여줍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별미를 사냥해 오는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려 했습니다. 신학적 확신보다 입맛이 앞선 것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지만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자신이 직접 그 뜻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나섰습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말에 따라 형과 아버지를 속였고, 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그러함에도 억울하다며 울부짖었습니다.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은혜를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란 본질적으로 수혜자의 자격을 무시합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먼저 태어나서 받는 것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것이 왜 인간에게 이토록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는 역사가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복음을 제시하셨을 때, 인간은 그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자신의 존재감이 지워지는 것, 자신의 무력함이 폭로되는 것을 인간은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속임수로 빼앗은 축복은 유효합니까, 무효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로마서 9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야곱이 축복을 도둑질해서 그것이 유효해진 것이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 축복이 야곱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니 이삭이 그것을 취소할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합니다. 이삭이 두려워 떨었던 것은 그가 어떤 마법 같은 힘을 발동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이루어졌음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두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붙잡아야 한다. 야곱의 집념이 기특하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오독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남의 집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장면에서 열심의 교훈을 끌어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중풍병자의 열심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사해졌다." 그는 지붕을 뜯는 열심으로 죄 사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 안에 이미 있던 사람이었기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빌어준 축복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두 가지가 눈에 띕니다. 기름진 땅의 풍요, 그리고 열국을 다스리는 통치권입니다. 이것은 이삭의 창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그리고 이제 야곱에게 반복하여 주시는 언약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언약이 처음 주어졌을 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목적지가 없는 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겜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여기가 그 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땅이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으로 묘사되고, 요한계시록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임이 밝혀집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계시의 점진성'이라 부릅니다. 마치 이른 새벽에 서서히 밝아오는 지평선처럼,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 속에서 점점 더 선명해집니다.
그런데 이 풍요로운 땅의 약속은 창세기 3장의 저주와 선명하게 충돌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땅은 저주 아래 놓였습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가나안 땅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주받은 이 세상 안으로 저주받지 않은 다른 나라가 침투해 들어올 것임을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지중해 동쪽 어딘가에 있는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땅을 가리키는 비유였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야곱은 그 모든 축복을 '꾀를 내어 얻은'뒤 빈손으로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재산에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기름진 땅이 약속되었지만 그는 오히려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 시대에 가나안 일경이 모두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오는 듯했지만, 결국 그들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을 어기신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 가나안이 아님을 반복하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세상의 기름짐과 풍요로움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한 단어가 마치 강물처럼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후손'이라는 단어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흐릅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야곱에게로 흘러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만들고, 다윗의 언약으로 다시 모입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이 강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갈라디아서가 대답합니다.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런데 로마서는 또 다른 대답을 보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놀랍습니다.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교회를 함께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것을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나님의 언약은 처음부터 한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죄의 머리를 밟고 하늘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세우시는 것이 야곱에게 내려진 축복의 실체이며,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흘러온 언약의 종착지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아직 반전이 남아 있습니다. 창세기 27장의 야곱과 48장의 야곱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임종을 앞둔 노인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빌어주며 장자 므낫세가 아닌 차자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팔을 바로잡으려 하자, 야곱은 조용하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27장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자신의 욕심으로 그것을 가로채려 했습니다. 48장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손을 그 뜻에 맡깁니다. 같은 상황, 그러나 정반대의 인간입니다.
모세는 이 변화의 과정을 장장 스물두 장에 걸쳐 기록했습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빚어내시기 위해 그의 인생 전체에 깊이 간섭하셨습니다. 험악한 삶이었지만 단 하나의 순간도 하나님의 손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 변화의 비결이 무엇인지는 빌립보서 2장이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열국이 무릎을 꿇는 통치권, 하늘의 기름진 땅, 이 모든 야곱의 축복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 승리의 방법은 힘이 아니라 순종이었고, 쟁취가 아니라 비움이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별미 한 그릇의 향기에 이끌려 그 언약을 저버리려 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 장면에 '주술의 시작'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가져오면 신의 복을 빌어주는 무당의 행태가 이삭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치욕스러운 평가지만,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번영을 약속하고, 성공을 보장하고, 물질적 풍요를 신앙의 증거로 제시하는 목소리들이 복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하나님의 상속권을 팔아버렸듯,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이야기에 그 귀한 자리를 내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명령하셨습니다. "도망가라." 코리 텐 붐이 라벤스브뤼크에서 발견한 것은 번영이 아니었습니다. 성공도, 물질적 축복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철조망 안에서 빼앗길 수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수용소의 차가운 막사 안에서도 살아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것이 야곱에게 내려진 축복의 정체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백성들의 삶에 깊이 간섭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사기꾼 야곱을 순종하는 이스라엘로 빚어내시는 것, 욕망으로 가득한 이 손을 비워,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놓는 자로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그 길은 좁고, 때로는 험합니다. 야곱의 삶이 그랬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랬으며, 예수님의 길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끝이 어디인지를 우리는 압니다.
빼앗길 수 없는 것을 붙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강한 힘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힘을 빼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이 마침내 도달한 자리였고, 우리 교회가 향해 가야 할 목적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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