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가 치는 외삼촌의 양 떼를 보고, 우물 아귀에서 돌을 굴려내어, 외삼촌의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창세기 29:10)
어느 목사님께서 한 자매를 만났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분이었는데, 조용히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에 다닌 지 이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마음이 이렇게 허전한 걸 보면 제 믿음이 가짜인가 봐요."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이십 년을 신앙생활 했는데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그 고백,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 믿음이 가짜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채움을 구하는 곳이 잘못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우물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창세기 29장에서 야곱은 긴 여행 끝에 낯선 땅에 도착합니다. 그곳에는 우물이 있었고, 양 떼에게 물을 먹이러 온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라헬이 왔습니다. 그녀는 신랑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러 온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우물가에서 그녀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이 장면은 성경 안에서 처음이 아닙니다. 창세기 24장에서 리브가도 우물가에서 이삭의 신부가 되었고, 출애굽기 2장에서 십보라도 미디안 광야의 우물가에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세 이야기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부들은 누구도 그 자리에서 신랑을 만날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필요를 채우러 왔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후손이 그 자리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들은 그 만남으로 인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전혀 다른 길로 이끌려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 반복되는 그림을 통해 무언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정오에 혼자 우물가에 나온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 살던 그 여인이 하필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다섯 번 남편을 바꾸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었으니, 마을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사실 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타락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의 문제였습니다. 남편이 바뀔 때마다 '이번에는 다르겠지'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도,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그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우물을 바꾸었지만 목마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더 좋은 직장을 얻으면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면,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노후가 안정되면 그 허전함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쉬지 않고 우물을 찾아 걷습니다. 그런데 어느 우물에서도 그 갈증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습니다. 채워지는가 싶으면 또 다른 목마름이 올라옵니다.
그 여인이 정오의 뜨거운 햇볕 아래 야곱의 우물가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그곳에 먼저 와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피해 요단강 건너편으로 돌아다닐 만큼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일부러 그 길을 택하셔서, 서두르시며 그 우물가로 가셨습니다. 얼마나 고단하셨던지 도착하자마자 우물 곁에 주저앉으셨습니다. 참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먼저 달려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세상의 우물 곁에서 하늘의 생수를 내미시는 신랑, 이 장면이야말로 성경 전체가 반복하여 그려온 그 그림의 완성입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값없이 와서 사 먹으라." 어떤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공짜는 뭔가 부실하지 않을까?' 세상에서 정말 귀한 것치고 공짜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공짜의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구원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은 그것이 값싸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값을 치를 수 없을 만큼 귀하기 때문에 거저 주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희귀한 혈액형을 가진 환자가 대수술을 앞두고 있었는데, 맞는 혈액이 구해지지 않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멀리서 달려온 한 사람이 자신의 피를 내어주었습니다. 수술은 성공했고 환자는 살아났습니다. 나중에 환자가 그 헌혈자를 찾아가 "제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잘 사세요." 그 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었기에 값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구원이 꼭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치러진 대가를 우리가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신부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생수의 근원이 바로 앞에 서 계신데, 사람들은 스스로 웅덩이를 팝니다. 그리고 그 웅덩이는 터져 있어서 아무리 퍼 담아도 고이지 않습니다.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오직 사업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왔습니다. 새벽에 나가 자정에 들어오는 생활을 수십 년 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간단했습니다. "지금 조금만 더 고생하면, 나중에 여유롭게 살 수 있어." 그런데 막상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그는 더 큰 공허함에 사로잡혔다고 했습니다. 가족은 이미 그가 없는 삶에 익숙해졌고, 정작 여유가 생겼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그동안 열심히 판 우물에 물이 없더라고요."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터진 웅덩이, 그것이 세상의 우물의 본질입니다.
주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그 말씀을 하신 상황이 흥미롭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긴 여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누군가 떡을 단 한 개밖에 챙겨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두고 제자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이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칠병이어의 기적, 곧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았던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떡 한 개를 앞에 두고 불안해하며 서로를 탓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것을 '외식'이라고 하셨고,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외식이란 단순히 겉과 속이 다른 것만이 아닙니다. 하기 싫어도 가족을 위해 출근하는 것은 외식이 아니라 성실입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에게도 인사를 건네는 것은 외식이 아니라 인내와 순종입니다. 외식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나 자신의 인기와 자랑과 유익을 위해 행하는 모든 종교적 열심입니다.
그 누룩에 물들면 어떻게 됩니까? 내 손 안의 떡에 눈이 고정됩니다. 그것이 부족하면 불안해지고, 풍족하면 교만해집니다. 경건해 보이는 행위까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쓰게 됩니다. 바울은 그것의 결과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교회 안의 시기와 분쟁이 어디서 오는지, 이 말씀이 정확하게 짚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나'를 내 인생의 왕좌에 올려놓은 데서 비롯됩니다.
오늘날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그의 책 『특이점이 온다』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머지않아 인간의 뇌를 컴퓨터에 업로드하고, 수십억 개의 나노 로봇을 인체에 주입해 생물학적 노화를 막으며, 인공지능과 인간 지성이 결합한 사이보그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죽음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 되고, 빈부격차도 사라진 진정한 지상낙원이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에 대해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과연 그러하니라." 인간의 예견은 맞아 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과연 낙원이겠느냐고 말입니다. 인간의 고독과 공허함은 지능이 높아진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수명이 천 년이 된다고 해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없이 자기만을 위해 사는 본성 그대로 영원히 죽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면, 성경은 그것을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세상에 등장했을 때, 수많은 지식인들이 지상낙원의 도래를 믿으며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은 무려 1억 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시대마다 하나님 이외의 대안을 이 세상에 던집니다. 그리고 시대마다 그 미혹은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보십시오. 우물가에서 언약의 후손을 만나 언약 안으로 이끌려 들어왔지만, 그들이 곧바로 완전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식 낳기 경쟁을 벌이며 서로를 시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나안을 향해 이끌어 가시며, 당신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다듬어 가셨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여정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이신 주님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라 하시면 사랑하고, 용서하라 하시면 용서하고, 참으라 하시면 참고, 섬기라 하시면 섬기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랑은 자신의 목숨을 값으로 치르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잃지 않으십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목자의 마음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신부인 교회는 성령과 함께 이렇게 외칩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이십 년을 교회에 다녔는데도 마음이 허전하다고 했던 그 자매 분에게 목사님은 이렇게 여쭤보았습니다. "자매님, 그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우려 하셨나요?"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기도도 해보고, 봉사도 해보고, 성경도 읽어봤는데 그게 다 저를 위한 것이었던 것 같아요."
그 고백 안에 이미 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하는 모든 행위가 결국 '나'를 위한 것이 될 때, 그것은 또 다른 우물 파기에 불과합니다. 그 우물은 터져 있어서 채워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내가 무언가를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우물가에서 이미 나보다 먼저 와 기다리고 계셨던 신랑이, 값없이 내미시는 생수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생수를 받아 마시는 것, 그리고 그 신랑의 손을 잡고 그가 이끄시는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 우물가에 오늘도 주님이 먼저 와 앉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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