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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말씀 묵상

얼룩진 자리에서 피어난 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15.

"레아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좋은 선물을 주셨구나. 내가 아들을 여섯이나 낳았으니, 이제부터는 나의 남편이 나에게 잘 해주겠지 하면서, 그 아이 이름을 스불론이라고 하였다."(창세기 30:20)

한 남자가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습니다. 아내는 셋째를 낳는 중이고, 그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첫째와 둘째 사이, 그리고 두 집안 사이에 있었던 오랜 갈등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형제간의 재산 다툼, 며느리들 사이의 은근한 신경전, 아이 이름 하나를 짓는 데도 담겨 있던 자존심 싸움, '이렇게 지저분한 사연들 속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정말 축복받은 아이일 수 있을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성경 창세기 30장을 처음 읽는 사람도 아마 비슷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라헬은 언니 레아를 시샘하여 "
나도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남편을 다그치고, 레아는 몸종까지 동원해 아들 숫자로 맞섭니다. 아들 낳기 경쟁, 자귀나무 하나를 두고 벌어지는 거래, 그날 밤 누구 방에서 잘 것인가를 두고 오가는 흥정,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들은 바로 이 지저분한 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고결하고 평온한 배경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그 진흙탕 같은 자리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착해서, 혹은 상황이 아름다워서 복을 주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 속에서, 인간의 자격이나 조건과 무관하게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같은 책 30장 후반부에는 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과 계약을 맺습니다. "
얼룩지고 점 있는 양과 염소는 제 몫으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얼룩진 개체들을 모조리 골라 아들들에게 맡겨 사흘 길 떨어진 곳으로 보내버립니다. 야곱이 치는 가축 중에서는 도무지 얼룩무늬가 나올 수 없도록 손을 써 놓은 것입니다.

야곱은 어떻게 했을까요? 나뭇가지 껍질을 벗겨 흰 줄무늬를 낸 다음, 양떼가 물 마시는 구유 앞에 세워 두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짐승이 물을 마시며 교미하고, 그 순간 눈에 보이는 것이 새끼에게 영향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엔 아무 과학적 근거도 없는 미신에 가까운 행동입니다.

마치 이런 모습과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시험 합격을 위해 특정 색깔의 옷만 입고, 특정 자리에만 앉아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력과는 무관한 자기만의 징크스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야곱의 나무껍질 벗기기도 딱 그랬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얼룩무늬 나뭇가지를 본 양들이 정말로 얼룩진 새끼를 낳았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
지성이면 감천이구나,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는구나" 하는 교훈을 끌어냅니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나뭇가지 때문에 복을 주신 게 아니라, 이미 그에게 복 주시기로 한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 계셨을 뿐입니다. 야곱은 그저 자기 나름의 꾀와 미신으로 이미 정해진 복을 스스로 쟁취하려 애쓰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을 대표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 낳기 경쟁을 벌이던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반드시 태어나게 될 열두 지파의 조상들을,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와 자기 꾀를 동원해 낳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진짜 복은 무엇일까요? 시편 133편은 "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기 전이었기에, 하늘의 풍요로움을 재산과 자녀와 장수라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이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만으로도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알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갈등, 즉 인간의 몸부림과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 사이의 간극은 결국 얍복강 나루터에서 해결됩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환도뼈를 다치고서야, 자신이 평생 움켜쥐려 했던 복이 진짜 복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여기서 잠깐, 이런 상상을 해보십시오. 물에 빠진 아이를 아버지가 처음부터 물가에 못 가게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물에 빠지게 놔두었다가 건져내실까요? 이사야 43장에서 하나님은 "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부터 안 들어가게 막지 않으시고, 들어간 후에 건져내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힘과 자기 꾀로 복에 이르려 하기 때문에 자꾸 물속으로, 불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때마다 신실하게 건져 내십니다. 야곱의 나뭇가지 사건이 바로 그 축소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장'이라 불립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조금 당혹스럽습니다. 한 청년이 신앙 서적에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읽고 크게 감동받아, 자신도 그런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갖고 싶다고 다짐했다고 해보십시오. 그런데 창세기를 직접 펼쳐보니 이야기가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흉년이 들자마자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 목숨을 부지하려 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 하셨을 때 오히려 그 약속을 비웃었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사람을 쳐 죽이고 두려워 도망친 사람이고,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 부르셨을 때도 극구 사양했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 지 며칠 만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통곡했고, 결국 그 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 청년이라면 아마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
이게 정말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바로 그 지점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실 하나를 알려줍니다. 믿음은 원래 인간이 만들어내고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불가능하고 연약한 사람들 속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이루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흔들리는 인생을 끝까지 붙드셔서 결국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신 분은 아브라함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상황과 비슷합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는 몇 번이고 넘어지고, 페달을 잘못 밟고, 방향을 잃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계속 아이의 자전거를 붙잡고 함께 달려주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자전거를 잘 타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
저 아이는 스스로 배웠다"고 감탄합니다. 하지만 진짜 그 균형을 만들어낸 것은 뒤에서 끝까지 붙잡아 준 아버지의 손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의 사람들이 딱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그들의 믿음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이 붙드신 손의 흔적입니다.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
아빠는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는다." 그 말 속에는 아들의 현재 실력이나 성적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담긴 게 아닙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과 확신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아버지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알며,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분이라면 어떨까요? 그 소원은 반드시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성경의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작정, 계획, 언약입니다. 죄인 된 우리를 다시 당신의 자녀로 완성해 내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심, 그것이 하나님의 믿음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거나 의지한다면, 그것은 어느새 자기 의(義)가 되어 버립니다.

마태복음 17장에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아들은 간질로 심하게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갔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마침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 아버지가 달려와 엎드립니다. "
제 아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탄식하시며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십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왜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주님의 답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였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제자들이 예전에 실제로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마10:1). 처음 파송받았을 때는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냈던 그들이, 이번에는 실패했습니다. 왜일까요? 어떤 신입 의사가 첫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 후 두 번째 수술에서 그는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임했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당황하고 맙니다. 첫 번째 수술이 성공한 것은 사실 스승 의사가 뒤에서 세심하게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자기 실력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비슷했습니다. 과거의 성공 경험을 근거로 '우리에게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자기 믿음과 자기 기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려 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능력을 신뢰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그들 앞에서 귀신은 나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하필 변화산 사건 바로 다음에 붙어 있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변화산은 시내산과 겹쳐지는 자리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내려왔을 때,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
이것이 우리를 인도할 신이다" 외치고 있었습니다. 변화산 아래에서 벌어진 일도 본질적으로 같은 사건입니다.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는, 여전히 자아 중심적인 신앙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옮길 수 있다." 여기서 '겨자씨'는 당시 사람들이 "이보다 작은 것은 없다"고 여기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핵심은 사실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고 발휘할 수 있는 믿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서 간혹 나타나는 믿음이란, 하나님이 뚫고 들어오셔서 심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묶고 있던 율법의 산, 우리를 짓누르던 자기 자랑과 교만의 산을 단번에 바다로 던져,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평평하게 만드신 사건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원어의 결에 가깝게 읽으면 이렇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즉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믿음이 먼저 우리 안에 들어와,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만약 처음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던 그 남자가 이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아이가 태어나는 이 순간, 그 배경에 있었던 모든 갈등과 지저분한 사연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 가정에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믿음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낙심될 때, "
내 믿음은 가짜인가 보다" 자책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정말 믿음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믿음이 나를 뚫고 들어와, 내가 믿음 있는 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자꾸만 겨자씨처럼, 아니 그보다 더 작게 보잘것없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 주님의 믿음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먼저 죽으십시오.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무언가를 이루어내려 애쓰기 전에, 내가 바로 그 도움이 절실했던 사람이었음을 먼저 인정하십시오. 그 자리에서부터, 우리 안에 이미 심겨 있던 그리스도의 믿음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