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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1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브리서 6:9~12)

히브리서 6장 9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을 처음 읽으면, 얼핏 이렇게 들릴 수 있습니다.
“너희가 올바르게 행동하고, 열심히 살고, 성숙한 삶을 살아야 구원을 잃지 않는다.” 마치 신앙의 성패가 우리의 태도와 노력에 달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단락만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 일관되게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참된 중보자,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구원이 전적으로 약속과 은혜였음을 강조합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갑자기
“너희가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훈계가 튀어나올 리 없습니다. 이 본문은 인간의 열심을 독려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끝까지 붙들라는 초대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10절은 종종 오해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많은 번역과 설교는 이 말씀을 “우리가 하나님과 성도를 섬긴 수고를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불의하지 않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행위에 따라 마음을 바꾸거나, 당신이 시작하신 일을 중도에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이 신실하심은 곧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은 당신이 세우신 구원의 뜻을 끝까지 완성하시겠다는 결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아르곤)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공로가 아닙니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까지 이루신다”는 그 하나님의 일,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또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의 주체 역시 우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언제나 분명히 말합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너희를 구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존재라면 십자가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난 사랑은 오직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도를 섬기셨고, 지금도 섬기고 계시며, 그 일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 장면은 종종 이렇게 설명됩니다.
“이미 구원은 받았지만, 날마다 짓는 죄는 계속 씻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족하니라.” 이 말씀은 반복되는 회개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을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기억하게 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발 씻김은 그분이 떠나신 후에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당신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계속해서 가르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 섬기고 물러나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섬기고 계십니다.

출애굽기에는 히브리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6년이 지나면 종은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종이 주인과 아내를 사랑하여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귀를 뚫고 영원한 종으로 남게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종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이후에도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시기에 흔적을 가진 채 우리 곁에 남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이래도 되느냐”고 다그치기 위해 섬기시는 것도 아닙니다. “네 모습 그대로,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했다.” 그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섬기십니다.

사람은 선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 수도 있고,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그 열심의 중심에는 언제나
‘나’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았는데, 하나님은 왜?” 고난 앞에서 터져 나오는 이 질문은 우리 신앙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했던 모든 행동이 사실은 나를 위한 투자였음을, 우리는 그때서야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로 포장된 신앙, 하나님의 영광을 빌린 자기 의, 약속은 인간의 행위를 배제합니다. 그래서 11절과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으라.”

약속은 조건이 아닙니다. 약속은 인간의 공로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으로 일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건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무언가를 이루어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신앙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누구 안에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어떤 신분으로 그 일을 했는가를 보십니다. 불신자의 선행은 죄일 수 있고, 성도의 연약한 걸음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선으로 사용됩니다. 성도란, 죽은 나 위에 성령이 얹혀진 존재입니다. 죽은 나의 궤적을 따라 성령께서 역사를 끌고 가십니다. 그 흔적을 우리는 ‘행함’이라 부를 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고 계십니다. 신앙생활은 부담이 아닙니다. 증명해야 할 과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시면 일하고, 쉬게 하시면 쉬면 됩니다. 주시면 받고, 거두시면 내려놓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삐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못 했다고 구원을 취소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섬기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말씀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 있으면 됩니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