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브리서 7:1~3)
복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보다는 예수에게 붙들리게 합니다. 히브리서 7장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한 인물을 우리 앞에 세웁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를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자”라고 부릅니다. 그의 이름은 멜기세덱, 살렘 왕이며 곧 평강의 왕입니다.
이 설명은 의도적으로 낯설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은 한 개인의 위대한 신앙을 보여주는 인물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자격과 공로를 무력화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왕을 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이 멜기세덱을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를 찾은 것도 아니고, 복을 요청한 것도 아닙니다. 멜기세덱이 먼저 나타났고, 아무 조건 없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부었습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의 인생은 완전히 차압 당합니다.
복을 받았으면 삶이 달라져야 할 것 같은데, 아브라함의 인생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는 두려워하고, 여전히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여전히 위대한 영웅처럼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왜입니까? 그의 삶이 도덕적으로 개선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인생이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쳤다는 것은 재산 일부를 헌금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십일조는 언제나 전부를 상징합니다.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 것은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헌금은 나의 성의나 헌신을 증명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헌금은 나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최초의 헌금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듯, 모든 헌금은 언제나 죽음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은 사용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손을 떠나는 순간, 헌금의 의미는 이미 완성됩니다. 그 이후의 결과로 나를 증명하거나 자랑하려는 순간, 헌금은 다시 우상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언제나 낯섭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왜입니까? 복이란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이 부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내 안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만한 것이 단 하나도 없구나.” 이 깨달음이 바로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앞에서 경험한 사건은 산상수훈의 팔복을 미리 보여주는 작은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복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잘되면 복 받았다고 말하고, 고난을 당하면 복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우리가 복 없다고 여기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광과 권세를 내게 절하면 주겠다.” 마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역사, 이 세상, 이 흙은 이미 뱀에게 넘겨진 영역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방식으로 사람을 모으고, 번영과 성공을 복으로 제시할수록 기독교는 점점 복음에서 멀어집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제단을 부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 자기 의를 쌓는 종교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늘어나는 것이 항상 복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가장 먼저 부수고 싶어 하시는 대상이 가장 번성해 보이는 종교일 수도 있습니다.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재산도, 남편도, 두 아들도 잃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며느리들에게 떠나라고 말합니다. 오르바는 떠났습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떠나지 않습니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이방 여인인 룻은 말합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이 고백은 결단이 아니라 사로잡힘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고백입니다.
그 이후 룻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녀는 거지가 됩니다. 남의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주워 연명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신랑이 그녀를 찾아옵니다. 구원은 우리가 신부가 되기 위해 무언가를 이뤄내는 과정이 아닙니다. 구원은 신랑이 우리를 붙들어 자기 자리로 끌어올리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관원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모든 자존심과 자기 의를 완전히 폭로해 버리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십자가를 미워합니다. 자기를 비추는 거울을 부숴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간을 고발하시고, 동시에 모든 인간을 살리십니다. 성도는 매일 그 피를 마셔야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의 피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성도입니다.
성도의 삶은 끌려가는 삶입니다. 원하지 않는 자리, 도망치고 싶은 환경, 설명되지 않는 고난 속에서도 이상하게 예수를 떠날 수 없는 상태가 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가라.”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밀어내면서도 붙들고 계시는 사랑, 그것이 은혜입니다.
멜기세덱은 지금도 항상 제사장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우리 인생을 차압하시고, 우리를 끝까지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잘 살아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억울해도, 분노가 올라와도 그냥 끌려가면 됩니다. 우리를 붙들고 계신 분이 결코 놓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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