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히브리서 7:4~10)
히브리서 7장은 성경을 조금 읽어본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멜기세덱, 아브라함, 레위, 십일조 같은 개념들이 한꺼번에 등장하고, 그 모든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히브리인, 곧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편지였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었지만, 여전히 율법과 유대교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가르치기 위한 책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이것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걸 안 하면 하나님이 노하시지 않을까?” 그래서 신앙은 자유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점검과 불안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해, 율법을 은혜로 뒤집어 풀어내는 책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일조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창세기 14장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318명의 집에서 기른 종들을 이끌고, 당시 최강이라 불리던 5개국 연합군을 쫓아가 승리하는 장면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전쟁입니다. 훈련된 정규군도 아닌, 무기도 변변치 않은 사람들이 세계 최강의 연합군을 이겼습니다.
아브라함 스스로도 알았을 것입니다. “이건 내가 이긴 전쟁이 아니다.” 그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전쟁이다.” 아브라함은 그 말을 듣고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칩니다. 이것이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는 율법의 요구가 아니라, 고백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이 승리도, 이 전리품도, 이 구출도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전리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롯을 포함한 “구출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신약적으로 보면, 이는 마귀의 세간에서 탈취해 온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를 예표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서에서 “강한 자를 결박하고 그의 세간을 탈취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일조는 바로 그 구원의 사건을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십일조가 왜 하필 ‘십분의 일’일까요. 이것은 단순한 비율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인간이 가장 불안해하고, 가장 계산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너무 많아도 할 수 있고, 너무 적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딱 십분의 일은 늘 손이 떨딥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인간의 결단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나는 거저 사는 자입니다”라는 고백의 자리가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십일조를 이렇게 바꾸는 순간입니다. “이 십분의 일은 하나님 것, 나머지 아홉은 내 것.” 이 순간 십일조는 은혜의 고백이 아니라 율법이 됩니다. 하나님과 거래가 됩니다. “이만큼 드릴 테니, 나머지는 내 삶에 간섭하지 마세요.” 이것은 헌금이 아니라 계약입니다.
구약 율법으로 가면 십일조는 레위인들의 생활비가 됩니다. 레위인에게는 기업이 없습니다. 땅도, 유산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사실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존재는 레위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였습니다.
유월절 사건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린양의 피로 장자들이 살아났슥니다. 장자는 한 가문을 대표하고,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살려주었으니, 너희는 다 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역사 속에서 살 수 없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한 지파, 레위인을 택하셨습니다. “너희는 나 대신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 살아라.”
그래서 십일조란 본래 이런 의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자리에, 당신들이 대신 서 계시기에 나는 나 자신을 돈으로 환산해 드립니다.” 레위인조차 십일조를 받으며 고백합니다. “우리는 기업도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이 모든 구조가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져야 할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최초로, 완전히, 온전히 바쳐진 분이 예수입니다. 그래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초의 십일조인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드려지신 이후, 다시 십일조를 율법으로 요구하는 것은 십자가를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논리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십일조’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대신 ‘연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연보는 비율이 아닙니다. 연보는 존재의 문제입니다. 내 안에 있는 은혜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돈을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많이 배웠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것이 나의 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사람은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눔은 돈이 많아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많이 가질수록 더 움켜쥡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재산을 내놓은 것은 도덕성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알았습니다. “내 인생은 전부 은혜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마게도냐 교회처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연보를 간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헌금이 아니라, 은혜가 흘러나온 결과였습니다.
헌금은 은혜를 내놓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며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계산일 가능성이 큽니다. 성도는 헌금하면서 자신을 발견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라 말하면서, 이것 하나 내놓는 게 왜 이렇게 어렵지?” 그 자리에서 성도는 배웁니다. “예수라는 십일조가 없었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헌금은 훈련이 됩니다. 은혜를 더 깊이 붙드는 훈련인 것입니다.
인간의 의와 행함은 밤의 네온사인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화려해 보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떠오르면, 그 빛은 민망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네온사인을 자랑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태양을 보길 원하십니다. 모든 율법과 모든 명령은 우리를 유능한 종교인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를 더 깊이 붙들게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공력은 다 타버리고, 예수만 남게 됩니다. 그 예수를 붙들고 사는 삶, 그것이 은혜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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