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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말씀 묵상

더 좋은 소망으로 가까이 가는 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7.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브리서 7:19~25)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문장 하나로 인간이 의지해 왔던 모든 종교적 장치를 무너뜨립니다. 율법, 제사, 성전, 혈통, 노력, 반복되는 헌신, 그 어떤 것도 인간을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소망”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론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들은 인간의 족보 위에 서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제사장이 되었고, 또 죽으면 다른 아들이 이어받았습니다. 수요가 많았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들은 계속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들이 죄 아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합니다. 자기 죄도 해결하지 못한 자가 어떻게 타인의 죄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는 아론의 반차를 지웁니다. 삭제합니다. 기각합니다. 그리고 한 분을 전면에 세웁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 예수, 이 반차에는 단 한 분만 계십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설명되지 않습니다. 혈통도 없고 계승도 없습니다. 은혜로
“뚝” 떨어집니다. 이 차이가 곧 복음입니다.

아론의 반차는 육의 방식입니다. 인간의 조건, 인간의 계보, 인간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반차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설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으며, 오직 주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7장은 예수는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간구’를 오해합니다. 마치 예수께서 하늘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이 실수하지 않게 좀 잘 지켜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간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간구’란, 날아오는 창과 화살 앞에 서서 “이 아이는 살려야 합니다”라며 자기 몸으로 막아서는 행위입니다. 기도 이전에 희생이 전제됩니다. 말 이전에 대신 맞음이 있습니다. 예수의 간구는 십자가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패 가능성을 염려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실패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구원은 조건이 없습니다. 행위의 평가표가 없습니다. 족보가 아니라 생명책에 이름을 올려버립니다. 생명책에 올라간 존재는 부족해도, 넘어져도, 사고를 쳐도
“내 자식”입니다. 심지어 그 인생이 지옥 갈 짓만 하다 정말 지옥에 가 있다 해도 구원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생명책을 들고 내려가
“너 왜 거기 있니?” 하고 끝까지 끌어내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래야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은혜를 견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진짜로 떨어지면, 아픕니다. 자각이 옵니다. “아, 내가 이런 인간이었구나.”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습니다. 예수는 그녀의 죄를 먼저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성전 논쟁을 율법의 문제로 몰아넣으셨습니다.
“그리심산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예수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신령과 진리다.” 이제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삶 전체가 예배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추악함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계시의 현장이 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내가 한 일을 다 말하더라.” 이게 말씀 앞에 선 사람의 반응입니다. 구원론을 정리해서 전도하지 않습니다. 자기 존재가 폭로된 충격을 말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왜 서로를 판단하고, 비교하고, 구렁을 파는가, 행위는 반드시 구렁을 만듭니다. “너와 나는 달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그 이야기입니다. 착하게 살았던 부자,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던 사람, 그가 지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위는 언제나 경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나사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이름의 뜻 그대로
“하나님이 도우셨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인간은 그렇게 무력해집니다. 그래서 복은 더 잘 살게 되는 게 아니라 다 비워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이 더 잘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끌어내셨습니다. 집도, 정착도, 안정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비워진 자만이 은혜를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역사를 거두고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여전히
“나”라고 합니다. 나의 옳음, 나의 정당함, 나의 자존심, 자아란 손에 창을 들고 스스로를 지키려는 태도입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그 창은 말씀을 향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먼저 하는 일은 무장해제입니다. 창을 빼앗고, 죽입니다. 성도의 죽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를 뜻합니다.

그때 비로소 실체를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점점 죽어가는 게 맞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율법은 기각되었습니다. 아론의 반차는 끝났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인 예수만이 더 좋은 소망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