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 8:10)
어린 시절, 골목 어귀에서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작은 손으로 흙을 긁어모아 밥을 짓고, 풀잎을 뜯어 반찬을 만들고, 돌멩이로 된 그릇에 정성스레 담아냅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가져와 말합니다. "아빠, 밥 다 됐어요. 드세요." 아버지는 웃으며 바라보지만, 그것을 입에 넣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정성이 가득해도, 아무리 모양이 그럴듯해도, 그것은 진짜 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냉정한 것이 아닙니다. 모형은 모형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8장은 바로 이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첫 언약은 모형이고, 새 언약은 실체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 앞에 내려놓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낸 것을, 하나님이 과연 받으실 수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지켰습니다. 구름 기둥이 움직이면 따라 움직였고, 멈추면 장막을 쳤습니다. 불 기둥이 서면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만나가 내리면 거두었고, 안식일에는 거두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은 매일 제단 앞에 섰고, 레위인은 성막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광야는 인간이 사십 년을 버티기에 너무 가혹한 땅이었지만, 그들은 버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내 언약 안에 머물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지켰는데 언약 안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율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손가락이었습니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 즉 장차 오실 예수를 믿는 것이 율법의 진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보지 않은 채 손가락을 붙들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실수인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스스로 나는 율법에 관하여 흠이 없는 자였다고 고백합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율법의 의로는 누구도 흠을 잡을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완벽한 율법 준수자가 또한 내가 하나님을 훼방하고 박해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직접 물으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박해한 것은 예수 믿는 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이 곧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서 동시에 예수를 박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열심히 지킬수록 예수에게서 멀어지는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형식은 살아있는데 생명이 없는 것, 그것이 바울이 자신의 과거에서 발견한 진실이었습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 놓고 보면 하나의 패턴이 눈에 들어옵니다. 언제나 가짜가 먼저 오고, 진짜가 나중에 옵니다. 아담의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있습니다. 가인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두 아내는 하갈과 사라입니다. 하갈이 먼저였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옛 하늘과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그 모든 쌍에서, 가짜가 먼저이고 진짜가 나중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순서를 선택하셨을까요? 진짜를 처음부터 보내면 안 되었던 것일까요? 집을 지을 때 건축가는 먼저 모형을 만듭니다. 작은 종이와 나무조각으로 만든 모형은 실제 건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형이 없으면 사람들은 완성된 건물이 어떤 모습일지, 왜 그렇게 지어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모형은 실체를 이해하게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세상 전체가 그 모형입니다. 하나님이 가짜를 먼저 보내시는 것은,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진짜가 왜 필요한지를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들, 우리가 쌓아 올리는 것들, 우리가 자랑하는 성취들은 그 자체로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들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 이 생의 교육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율법을 "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입니다. 구약에서 흠 있는 제물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율법이 흠이 있다는 것은, 아무리 완벽하게 지켜도 그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선고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고,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도, 그것은 소꿉장난의 밥과 같은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유가 이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 오늘날로 환산하면 수천억 원에 달하는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단돈 몇만 원을 빚진 동료를 멱살 잡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 어리석음의 뿌리는 하나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를 실제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가 그것을 가슴으로 알았다면, 백 데나리온의 채권자 앞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의 크기를 알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직 모르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존재가 흙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놀라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낯선 장면이 하나 등장합니다. 이십사 장로가 보좌 앞에 엎드려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 앞에 던집니다. 그들이 쓰고 있던 면류관은 하나님이 씌워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도로 던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성령이 꽂아주셔서 돌아간 것이지, 내가 돌아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언가가 이루어졌을 때,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면류관을 뻔뻔하게 쓰고 앉아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아이가 한 것으로 여겨주십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소꿉장난의 밥도 사랑스럽습니다. 그것이 진짜 밥은 아닐지라도, 아이가 정성을 다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압니다. 그 마음을 아버지가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 스스로는 그것이 진짜 밥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상을 더 받은 자와 덜 받은 자의 차등이 없습니다. 거기서 차등을 기대하는 것은 여전히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여한 것으로 보상을 받겠다는 생각은, 아직 일만 달란트의 빚을 가슴으로 모르는 것입니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을 선택하십니다. 법을 밖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겠다고 하십니다. 법을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나와 법이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이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율법 자체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음에 새겨진 법, 그분이 바로 예수인 것입니다.
새 언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이 바늘 끝만큼도 기여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외에 구원의 길이 없도록 설계하신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며, 그 믿음조차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처음 한 번의 말씀에 눈이 열리고, 어떤 사람은 수년을 들어도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지성이나 노력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시면 열리고, 그렇지 않으면 닫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오심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성령은 십자가 이전에 오셨어야 합니다. 그래야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제자들이 겟세마네에서 달아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끝까지 드러내 놓으신 뒤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가장 더러운 인간의 민낯 앞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가 교회를 완료시켰습니다. 인간의 성숙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라는 제물이 끊임없이 바쳐지는 곳입니다. 모세가 하늘의 성전을 보고 내려와 성막을 지은 것은 그 장면을 이 땅에 옮겨놓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으로만 존재하고 운영되는 곳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다만 받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성도들이 끊임없이 찬송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보고 묻습니다. 천국에서도 할 일이 없어 노래만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게으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간 이들의 고백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자리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셨다는 것을 안다면, 거기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찬송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 찬송에 이르기 위한 교육장입니다. 여기에는 진짜 사랑도, 진짜 은혜도, 진짜 용서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의 그림자가 잠시 허락될 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랑의 따뜻함, 용서의 홀가분함, 은혜의 감격은 그것들이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어딘가를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그 손가락을 붙들고 앉아 이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비극인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행복의 수단들, 우리가 축적한 성취들, 우리가 기대는 관계들, 그것들은 일시적인 위안은 줄 수 있어도 결국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지구가 인간의 손으로 파괴되어 가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역사가 인간의 열심으로 더 나아지지 않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만이 실체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하나씩 가치를 잃어가고 오직 예수에게만 집중이 되어가는 것, 그 앞에 납작 엎드려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 그것이 새 언약 안에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소꿉장난의 밥상을 내려놓고, 아버지가 차려주신 진짜 밥상 앞에 앉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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