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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말씀 묵상

율법의 모형과 예수의 실체 - 모형이 사라질 때 실체가 보인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8.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브리서 9:1~10)

어떤 아이가 아버지를 위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크레파스로 삐뚤빼뚤 그린 아버지의 얼굴이었습니다. 눈은 짝짝이고 코는 한쪽으로 쏠렸지만, 아버지는 그 그림을 냉장고에 붙여 두었습니다. 아이가 사랑을 담아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아이가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진짜 아버지를 눈앞에 두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여전히 냉장고 앞에 서서 그 낡은 크레파스 그림만 들여다보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림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림은 제 역할을 다했습니다. 문제는 그림이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임을 잊은 채, 그림 자체를 아버지로 삼아버린 데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이 말하는 첫 장막, 곧 율법과 제사 제도가 바로 그 그림이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실체를 가리키는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정교하게 설계하신 비유였습니다. 그러나 비유는 실체가 오면 제 임무를 마칩니다. 본문은 이것을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개혁'이란 기존의 것을 더 다듬고 보강하여 완성하는 일이 아닙니다. 실체가 도래하면 모형은 사라집니다. 파괴됩니다. 이것이 개혁의 참뜻입니다. 더 나은 율법이 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가리키던 분이 오심으로써 율법은 그 역할을 마치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생각해 봅시다. 70년간 이방 땅에서 노예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오는 길에 깊이 자각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자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린 처방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더 완벽하게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흠 있는 제물을 드렸던 과거를 반성하며, 이제는 점 하나 없는 제물을 드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율법 조항을 수백 개로 세분화하여, 단 하나도 어기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 결심은 수백 년 뒤 바리새인이라는 집단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성경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 규정 하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멀리 걸을 수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뱉은 침이 안식일을 어기지 않는지까지 따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지도를 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도는 목적지를 가리키는 도구입니다. 지도를 보면서 목적지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도 자체를 목적지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열심히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성경이 가리키는 분께 이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구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올바른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그 구호가 다시 하나의 율법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을 더 많이 공부해서 더 올바른 인간이 되자"로 변질될 때, 그것은 바리새인의 열심과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예수를 믿자"였듯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의 진정한 의미 역시 "예수를 믿자"여야 합니다. 성경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를 가리키는 지도입니다.

한 가지 불편한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똥개가 주인을 사랑합니다. 주인에게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똥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똥입니다. 개는 온 정성을 다해 그것을 차려 주인 앞에 내놓습니다. 주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걷어차야 합니다. 개의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개가 내놓은 것이 아무리 정성스러워도, 그것은 주인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전체를 죄 아래 가두어 두셨습니다. 그 죄 아래 갇힌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낸 것이라도,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내밀며 묻습니다.
"저 잘하고 있죠? 저 괜찮은 사람이죠?" 성전에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던 바리새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끝에는 언제나 '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기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종교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율법은 겉을 닦을 수 있습니다. 보이는 행동을 교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
"탐내지 말라"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아직 저지르지 않은 욕망,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움직임을 율법으로 어떻게 통제하겠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율법에 열심이어도, 탐심이라는 마음의 뿌리는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뿌리를 보십니다.

죄를 새롭게 정의해 봅시다. 죄는 단순히 나쁜 행동이 아닙니다. 죄의 본질은,
'없음'인 존재가 '있음'인 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시면 인간은 흙에 불과합니다.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자가 산 자인 척합니다. 스스로 존재한다고, 스스로 옳다고, 스스로 가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렇다면 죄 사함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봅시다. 돌을 든 군중들이 물러가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읽습니다. '이제부터 나쁜 짓 하지 마라.'

그러나 이 말씀의 깊은 뜻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면 된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돌을 들고 너를 정죄한다 해서 거기에 휩쓸리지 말라. 나와의 관계를 놓치지 말라." 죄 사함이란, 없음이 있음을 흉내 내던 그 거짓 생명을 죽여 버리고, 예수와의 관계 안에서 참된 존재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그는 '있음'이 됩니다. 그 관계를 떠날 때 그는 다시 '없음'으로 돌아갑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은, 그 관계를 놓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율법의 세계에는 개인만 있습니다. 각 사람의 행위가 낱낱이 기록되고, 그 기록을 근거로 상벌이 결정됩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혼자입니다. 서로 경쟁하고, 서로 판단하고, 서로의 기록을 비교합니다. 그 분리됨, 그 고립됨이 지옥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한 몸입니다. 교회는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머리 안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예수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만을 상대하십니다. 예수만이 상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 안에 있는 우리가 그 상에 참여합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해체된다는 뜻입니다. 천국에 개인 맨션이 있고, 서로의 집에 놀러 가는 그런 이야기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적 세계관, 곧 개인의 행위에 따른 개인의 보상이라는 체계를 천국에 그대로 이식한 것입니다. 한 몸 안에서 개별적인 자아를 챙기겠다는 발상은, 그 자체가 아직 율법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부활을 생각해 봅시다. 부활은 아름답고 환한 이미지로 포장되곤 합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단어는 죽음을 전제합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은 헛되이 죽으신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사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기 때문에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통과했기 때문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면서, 죽는 것이 사는 것임을 배웁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이 낡은 육의 몸을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 드리고, 예수 안에서 한 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에는 내 업적을 청구할 자아도, 내 헌신의 보상을 요구할 개인도 없습니다.

에덴에서 하나님이 생명나무 실과를 막으신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심판이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만약 막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죽은 자가 산 자인 척하는 상태 그대로 영원히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지옥입니다. 죽어야 할 존재가 죽지 못하고 영원히 없음을 있음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을 이 땅에 보내어, 살아가는 동안 계속 죽여 내십니다. 그 죽음의 끝에서, 진짜 생명나무 실과를 주십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선언하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이것은 인간의 행위를 전면 부정하는 선언입니다. 누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살았는가, 얼마나 열심히 율법을 지켰는가가 기준이 아닙니다. 오직 아브라함과의 관계, 곧 예수와의 관계가 기준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그 순간, 아브라함은 자기 심장에 칼을 꽂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 죽음의 순간에 생명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요, 복음입니다.

신학은 구원, 성화, 영화의 단계를 정형화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각 사람을 이끌어 가시는 방식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오랜 시간의 방황 끝에, 어떤 사람은 깊은 상실을 통해, 어떤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 정형화된 틀에 갇히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왜 아직도 저 모양인가."

그러나 야고보가 경고한 행함 없는 믿음이란 바로 이런 외모 판단입니다. 자기 생명의 실체에 집중하는 사람은 남의 잘못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춰볼 때, 가장 더러운 것이 자기 자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앎이 깊어질수록,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비통함으로 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이 아니라, 이 인간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오직 예수만을 붙드는 것입니다.

누에가 고치 속에서 자라다가 고치를 뚫고 나올 때, 그것은 고치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고치는 나비가 되기 위한 과정에 꼭 필요했지만, 나비가 되는 순간 고치는 버려집니다. 율법과 모형의 시대가 그랬습니다. 그 고치 속에 갇혀 고치가 전부인 줄 아는 것, 그것이 가장 불쌍한 지경입니다.

교회는 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늘 시끄럽고, 늘 실망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이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완성하십니다. 그 어수선한 현장 속에서, 생명을 향한 열망을 품은 이들이 있습니다. 직장도 집도 다 뒤로하고 복음을 향해 무작정 달려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귀를 하나님이 여시고, 그 눈을 하나님이 뜨게 하십니다.

어떤 걸림돌을 던져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 속에서 치고 올라옵니다. 복음을 붙들고 옵니다. 말씀은 거울입니다. 그 거울에 비춰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십시오. 내가 죽은 자라는 것, 내가 없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진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