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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말씀 묵상

십자가와 역사 - 성도의 죽음과 부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8.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브리서 11:36~40)

어떤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단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수십 년을 망치와 끌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작업복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돌을 깎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사람들이 작업실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본 것은 완성된 조각상이 아니었습니다. 바닥에 가득 쌓인 돌가루와, 그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채 아직 형체를 드러내지 못한 돌덩이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저게 평생의 작품이라고? 실패한 인생 아닌가?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 조각가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히브리서 11장 후반부는 참혹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돌에 맞고, 톱으로 켜이고,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을 걸치고 광야와 동굴을 유리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실패자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선언합니다. 세상이 그들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이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다고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고, 우리와 함께가 아니면 그들도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이 히브리서 전체를 여는 열쇠입니다.

창세기를 다시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이 동산이 아닙니다. 에덴이라는 영원한 세계 안에, 동산이라는 역사적 공간이 놓인 것입니다. 마치 광대한 바다 위에 작은 섬 하나가 떠 있듯이, 영원이라는 묵시 위에 시간과 역사라는 섬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동산에 아담을 아기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은 처음부터 성인이었습니다. 친구가 필요한 그 온전한 상태, 이미 완성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유아기도 없고, 사춘기도 없고, 성장통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노력하고 발전해서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성된 곳이라는 것을 아담의 창조가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거기에는 늙어짐도 없고, 썩어짐도 없습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오직 완성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늙기 시작했습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인류는 석기에서 청동기로, 철기를 거쳐 오늘의 디지털 문명까지 왔습니다. 눈부신 발전입니다. 그런데 발전하면 할수록 지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대기는 오염되고, 바다는 플라스틱으로 뒤덮이고, 생태계는 붕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 어려집니다.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어른들이 넘쳐납니다. 결혼을 해서도 부모에게 의존하고, 작은 결정 하나도 혼자 내리지 못합니다. 번영하는데 퇴행합니다. 성장하는데 어려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오래전에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가리켜
'썩어짐'이라 불렀습니다. 율법의 종, 세상의 종, 썩어짐의 종은 같은 말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쌓아도,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결국 썩고 죽는 것, 그것이 역사가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래사장에 성을 쌓는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성을 쌓습니다. 더 높이, 더 정교하게, 더 아름답게 쌓았습니다. 그런데 밀물이 들어옵니다. 아이가 얼마나 열심히 쌓았든,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든, 모래성은 무너집니다. 역사가 그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열심히 쌓아 올려도, 결국 썩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발전의 종착지는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난 후, 자신의 과거 전부를 배설물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버린 것은 방탕한 삶이나 세상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스승 가말리엘 아래서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힐렐과 샴마이, 당시 유대 사상의 양대 산맥을 모두 섭렵한 지성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결혼도 했고,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족마저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아내를 데리고 다녔지만 바울은 그것마저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흠이 없었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칭찬하는 삶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배설물이라 했습니다. 해악이라 했습니다. 왜입니까? 그가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저명한 화가가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불태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경악하며 물었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화가는 답했습니다. "이것들이 내가 진짜 그림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오." 바울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열심과 흠 없는 삶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이것이 성도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바리새인이 섰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불의하지 않았습니다. 토색하지 않았습니다.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독사의 새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설게 들립니다. 불의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은 것, 그것이 성도의 목표가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해냈다고 자랑하는 사람에게 욕을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은 착해졌을지 모르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선의 기준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쌓은 의를 하나님께 제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가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성도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착함을 추구하는 것이 오늘 이 시대 교회의 민낯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자마자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이 이방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왜 그 말씀이 필요했습니까? 결국 폭로됩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있는 사이, 그들이 만든 것은 금송아지였습니다. 황금으로 만든, 눈에 보이는, 손에 잡히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나를 위해 복을 주고, 나를 위해 싸워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금송아지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번영신학의 언어로 말합니다.
"믿으면 잘된다. 헌금하면 복 받는다.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얻는다." 신비주의의 언어로 말합니다. "은사를 받으면 더 높은 경지에 오른다." 기복주의의 언어로 말합니다. "열심히 살면 하나님이 갚아주신다." 겉모습은 다 다르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파루시아, 재림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나타나다', '현현하다'입니다. 먼 곳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숨겨진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가 실체로 보여지는 것이 재림입니다. 예수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재림하실 예수를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내 안에 예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까? 자아라는 두꺼운 껍질에 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쉬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가발전하려 하고, 스스로 성숙하려 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경지에 오르려 합니다. 그 자아가 예수를 가리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불교에서도
"부처를 죽여야 부처가 된다"고 하겠습니까. 종교의 언어가 다를 뿐, 인간의 자아가 진리를 가로막는다는 진단은 같습니다. 그 자아가 하나님에 의해 죽고 또 죽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역사는 내가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시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한 조각인 나의 인생 역시, 하나님에 의해 죽어야 내 안의 예수가 살아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죽는 것이 부활입니다.

요한이 묵시의 세계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본 것은 새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성문에는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십사 장로가 그 안에 있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자신의 면류관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자신이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 그 수고와 헌신과 고난의 훈장들을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것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알았기에 영문 밖으로 나가라고 외칩니다.  은혜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율법으로서의 예루살렘 성문을 나와야 한다고. 그러나 그 영문 밖은 위험합니다. 안전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를 바보라 부릅니다. 그리고 맞아 죽기 시작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이 그 삶을 살았습니다. 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을 선택했고, 결국 광야에서, 동굴에서, 칼 아래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그들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삶. 그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어떤 도시에 오래된 건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 그 건물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감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침내 혁명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 건물을 폭파했습니다. 잔해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몇 십 년이 지난 후, 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이름은 달랐습니다. 외관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똑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새 건물을 보며 옛 감옥은 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수신 것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이신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인간이 노력하고 열심을 내어 하나님 앞에 서려는 그 시도 전체였습니다.

중세 가톨릭은 면죄부를 팔았고, 죽은 자를 위해 재산을 바치라 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성화라는 이름으로,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율법은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마귀는 항상 양의 탈을 씁니다.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분명히 옳은 것처럼 옵니다.
중세에는 성경이 라틴어였으니 그럴 수 있다고 합시다. 지금은 성경이 한글입니다. 그런데 이해 수준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는 사라지고, 도덕과 윤리만 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성도의 이김은 믿음으로 인함이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네게 믿음이 있다면, 예수를 믿는다면, 네가 어떤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이김이라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모두
"이기는 자는"으로 끝납니다. 그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좌 우편에 앉히겠다, 생명책에 이름을 새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에베소서에서 이미 선포된 일입니다. 이미 보좌 우편에 앉아 있고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이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완성이 먼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먼저이고, 그 완성에서 역사가 흘러나옵니다. 역사의 끝에 완성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된 자들이 이 역사 속에서 그 완성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마치 이미 다 완성된 조각상이 있는데, 역사 속에서 그 조각상을 덮고 있는 돌가루를 걷어내는 과정과 같습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이 떠나라 하시면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드문 시대에 겨우 만난 교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흩으시면 흩어졌습니다.

교회가 욕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가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신 서머나 교회도, 빌라델피아 교회도 두세 대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교회는 이 세상에서 죽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참된 교회도 수시로 깨뜨리시는 것은, 교회 자체가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가 매력 있어서 모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전하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쫓아오면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처지와 환경을 계산하지 않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이 그들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덧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을 읽는 우리입니다. 그들의 온전함이 우리와 함께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역사의 처음과 끝을 이미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 이 지저분하고 부서지는 역사 속에서도 한 사람씩 붙들어 당기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물어야 합니다. 나는 말씀이 떨어지면 끝까지 자신에게 돌아가는 사람입니까? 은혜를 내 편의에 맞게 각색해 사용하는 사람입니까? 다수가 가는 길을 따라가며 안심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광야에서도, 맞아 죽는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일대일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나님과 단둘이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 씨름 속에서 비로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아무것도 아닌 자 안에, 이미 예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는 것이 이김입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삶이란, 바로 그런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