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1~7)
아침마다 거울을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자리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머리를 빗고 넥타이를 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는 거울 앞에서 점점 더 오래 머물기 시작했습니다. 주름이 늘었는지, 눈빛이 흐려졌는지, 어딘가 달라진 것은 없는지, 거울은 그를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울이 보여주는 얼굴이 점점 두려워졌습니다. 율법이 그런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을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라 부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닙니다. 실체가 지나갈 때 잠시 땅에 드리워지는 형상일 뿐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한 가지 일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히 10:3)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거울 앞에 선 그 사람처럼, 인간은 그 거울을 도구로 삼아 자신을 고쳐 보려 합니다. 거울이 "너는 죽었다"고 보여주면, 죽지 않은 척하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이 "너는 죄인이다"라고 선고하면 그 선고를 뒤집으려 더 열심히 율법을 지킵니다. 그래서 늘 불안합니다. 거울 앞에 서면 설 때마다 또 다른 흠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2장을 아는 사람은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러 모리아산에 오르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핵심은 흔히 오해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한 이야기로 읽습니다. "이렇게까지 순종할 수 있겠느냐"는 도전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짜 중심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더 정확히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지 않으셨는가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려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헌신이었습니다. 그 절정의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버지는 그 인간의 행위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수풀에 걸린 숫양을 가리키셨습니다. "저것이다." 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 주께서 준비하신다, 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야기가 말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회는 아들의 희생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버지는 인간의 행위를 끝까지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입니다. 아버지가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직접 준비하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4)는 말씀은 단순한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이 드리는 피를 받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피들은 모두 하나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을 뿐입니다. 수풀의 숫양은 출애굽의 어린 양이 되었고, 그 어린 양은 갈보리의 어린 양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처음부터 준비하신 것이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발꿈치를 잡는 자', 곧 빼앗는 자,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 이름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이름의 주인공에게 가장 중요한 신학적 역할을 맡깁니다. 에서는 장자였습니다. 성경이 그리는 에서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입니다. 들에 나가 짐승을 잡아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드릴 줄 아는 사람,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사람, 그에게는 장자의 축복을 받을 모든 자격이 있었습니다.
반면 야곱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냥 실력도, 요리 실력도, 장자의 풍채도 없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염소 새끼를 잡아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염소의 털가죽을 야곱의 팔과 목에 붙였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입고 아버지 이삭에게 들어갔습니다. "아버지, 저 에서입니다. 장자입니다." 이삭이 말했습니다. "목소리는 야곱인데, 손은 에서구나." 성경이 굳이 이 말을 기록해둔 이유가 있습니다. 목소리는 속일 수 없습니다. 이삭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구조입니다. 우리는 야곱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죽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나아갑니다. 아버지 이삭이 아들의 옷에서 나는 향기를 맡고 축복을 주었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서 아들의 향기를 맡으십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준비해준 별미를 들고 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뻔뻔했습니다. 자신이 에서가 아님을 알면서도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뻔뻔함은 수치가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에서입니다"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진짜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면서도, 내게 입혀진 옷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난 후 가나안까지는 직선으로 걸으면 열하루 거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십 년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광야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곳입니다. 씨를 뿌려도 열매가 없습니다. 목축을 하려 해도 풀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만나는 심어서 자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장해서 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려왔고, 매일 아침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의 모형입니다. 이 세상은 광야입니다. 여기서는 내가 무언가를 생산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혜를 받아먹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꾸 광야에서 농사를 짓고 목장을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씨가 자라지 않습니다. 자라는 것은 오직 위에서 내려오는 것뿐입니다.
경기도 이천에는 도자기 공방이 많습니다. 그곳에서 장인들이 도자기를 빚는 것을 보면, 천 개를 만들어도 그중 반 이상은 깨집니다. 조그만 흠이라도 발견되면 망치로 쳐서 부수어버립니다. 전시용 도자기는 완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흠이 있는 것은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반면 시골 부엌에는 바가지가 있습니다. 표주박을 반으로 쪼개 만든 그 바가지는 쓰다가 금이 가면 실로 꿰맵니다. 꿰맨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물을 뜨고, 쌀을 되고, 간장을 담습니다. 흠이 있어도 쓸모가 있습니다. 아니, 흠이 있어야 더 손에 익고 정이 듭니다. 성경이 우리를 질그릇이라 부를 때(고후 4:7), 그것은 모욕이 아닙니다. 정의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그릇입니다. 그릇의 가치는 그릇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담기는가에 있습니다. 밥그릇은 밥이 담길 때 밥그릇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담기실 때 비로소 우리가 됩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질그릇이 아닌 도자기로 만들려 한다는 것입니다. 전시용 도자기는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감탄합니다. 그러나 진열대 위에 올라가면 만지지도 못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담을 수 없게 됩니다. 가까이 가면 도둑 취급을 받습니다. 그것은 그릇이 아니라 조각품입니다. 도자기가 되려는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흠이 보일 때마다 스스로를 부수고 싶어집니다. 남의 흠을 발견하면 정죄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완전함을 증명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그릇임을 아는 사람은 다릅니다. 꿰맨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흠이 있어도 그것으로 물을 뜹니다. 내 안에 담기는 것이 나보다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있습니다. 왕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열고 귀한 손님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저마다 바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밭도 봐야 하고, 소도 시험해봐야 하고, 장가도 갔습니다. 왕은 종들에게 명했습니다. "큰길에 나가 만나는 대로 데려오라." 그래서 잔치에 온 사람들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격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왔습니다. 은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초청받은 사람들은 왜 오지 않았을까요? 바쁘기도 했겠지만,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잘 살고 있었습니다.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베푸는 잔치에 가서 공짜 밥을 먹는 것이 자신의 품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왜 은혜를 받으러 가야 해."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스스로 부유하다고 했고 스스로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가련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하나님의 눈에 그들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습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확신이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임합니다. 자신이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잔치에 가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 4:7). 사랑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전제 위에서 요한은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역설처럼 보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자들에게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설이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은 이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이 붙들 수 있는 것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마음속에 예수가 계실 때, 우리는 그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면, 예수를 품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는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그 감정은 변합니다. 상대의 단점이 보이고, 실망이 쌓이고, 처음의 열정은 사라집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될 것 같을 때 생겨나고, 유익이 사라지면 식어버리는 감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생겨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장점이나 유익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예수에서 옵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18:3). 여기서 어린아이는 갓난아기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밥을 스스로 먹을 수 없고, 옷을 스스로 입을 수 없습니다. 위험이 닥치면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기를 안고 가다가 위험한 상황이 생겼습니다. "아가야, 아빠만 믿어." 아버지는 싸울 것입니다. 그 아기에게 "너도 좀 도와줘"라고 요구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아직 이빨도 나지 않은 아기가 무엇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기저귀를 갈아줄 때 아기가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어머니, 죄송해요. 아직 제가 어려서 이런 민폐를 끼치네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성숙해서 스스로 할게요." 어머니는 기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는 그냥 사랑받으면 됩니다. 우는 것도 좋고, 웃는 것도 좋습니다. 어머니는 색깔까지 확인하면서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내 새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은혜를 덥석덥석 받아먹는 것입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면 아버지가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아기가 어느 순간 "이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며 품에서 벗어나려 할 때, 어머니는 패닉에 빠집니다. 하나님도 그러실지 모릅니다. 언제까지나 품에 안겨 있어도 됩니다.
히브리서 10장 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두루마리 책이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1장이 말하는 창세 전 언약입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결정하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만드시겠다고 말입니다. 그 결정의 실행을 위해 아들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들이 직접 피를 뿌리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만드시는 것은 이미 완성된 일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이미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우리의 점과 흠을 보며 두려워합니까?
도자기 장인은 흠이 있는 도자기를 깨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흠이 있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흠을 지우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우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이것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아직도 내가 도자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옵니다.
보석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흙이 오랜 세월 강력한 압력과 열을 견디며 변형될 때 만들어집니다. 보석은 흙이 스스로를 갈고닦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흙은 그냥 흙입니다. 다만 그 흙이 하나님의 시간과 불과 압력을 통과할 때, 그것이 보석이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성화를 통해 만들어 내는 보석은 천국의 길바닥 재료밖에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의 길이 정금으로 되어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금과 보석이 그곳에서는 그냥 발밑에 깔리는 것입니다. 진짜 보석은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과정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에게 흙을 맡기는 것입니다. 요강으로 쓰이든, 꿀단지로 쓰이든, 보석함으로 쓰이든 그것은 토기장이가 결정하십니다.
거울 앞에 오래 서 있던 그 사람은 결국 거울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거울이 보여주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거울은 지금의 모습을 보여줄 뿐, 앞으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깨지고 꿰맨 자리가 있고, 흠이 있고, 낡은 바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무엇이 담기는가가 중요합니다. 맑은 생수가 담기면 생수 바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담기시면 하나님의 그릇입니다.
도자기가 되려 하지 마십시오. 진열대 위에 올라가려 하지 마십시오. 그냥 하나님이 담기시도록 내어드리십시오. 그러면 지금 당신이 살아가는 모든 자리가 하나님의 일터가 되고, 당신의 모든 일상이 거룩한 성직이 됩니다. 예수를 붙드십시오.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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