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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말씀 묵상

거룩함을 얻은 성도의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4.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8~14)

어떤 사람이 오랜 친구에게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친구는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나 오늘 엄청난 거 받았어." 목소리에 흥분이 가득했습니다. "뭔데?" 하고 물었더니, 친구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냥 줬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줬다고." 그 말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그냥 주는 것이 어디 있냐고,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계속 말했습니다. "진짜야. 내가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받은 거야."

히브리서 10장 10절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얻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아조'의 완료 수동형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고, 과거에 일어났지만 지금도 그 효력이 유효한 것입니다. 거지가 밥을 얻어먹을 때 쓰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무언가를 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거룩해져 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거룩함을 얻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거룩함이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얻었다는 것은 곧 거룩함 자체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14절은 다시 한번 못을 박습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단 한 번, 그리고 영원히,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제사는 언제 드려진 것입니까? 역사 속에서는 이천 년 전 십자가에서 드려졌습니다. 그러나 더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에베소서 1장이 증언하듯 창세 전에 이미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역사가 시작되기 전, 시간이 생겨나기 전,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예수 안에서 거룩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죄를 지었다가 용서받고 의인이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설명은 하늘의 존재가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우리의 언어로 풀어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표현입니다. 성경을 인간의 이성과 인과율로만 읽으면, 결국 바리새인처럼 자기만의 신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학이 은혜를 가립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을 가장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많이 공부하고, 가장 정밀한 교리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가진 신학의 틀로 예수님을 해석하려 했습니다. 그 틀에 맞지 않자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고정된 틀이었습니다.

율법의 제사와 예물, 번제와 속죄제는 원형을 가리키기 위해 주어진 모형이었습니다. 마치 조선소에서 대형 여객선을 설계할 때 먼저 작은 모형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처럼, 그 모형선박은 실제 배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모형을 들고 바다에 뛰어들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습니다. 모형은 모형일 뿐, 사람을 태울 수 없습니다. 첫 것이 폐해지고 둘째 것이 세워진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모형은 원형이 나타났을 때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바로 그 모형을 붙들고 바다에 뛰어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계속 지자, 그들은 법궤를 생각해냈습니다. 전에 법궤를 앞세웠을 때는 요단강도 갈라졌고, 여리고 성도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그 경험을 신학으로 굳혔습니다.
'법궤를 앞세우면 이긴다.' 법궤가 전선에 나타나자 블레셋도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기충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정된 신학을 깨셨습니다. 전쟁에서 졌고, 법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습니다.

이스라엘의 신학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가져간 블레셋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워하다가, 별일이 없자 새로운 신학을 세웠습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네.' 그래서 아스돗의 신당에 법궤를 밀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가보니 다곤 신상이 엎어져 있었습니다. 다시 세워놓았더니 다음 날에는 목이 잘리고 손이 부러진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성읍 전체에 재앙이 돌았습니다. 에글론으로 옮겼더니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소에 실어 보냈고, 그 소는 사람이 몰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이스라엘 땅으로 걸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신학도 깨고, 블레셋의 신학도 깬 뒤에, 법궤는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신학적 틀 안에도 가두어지지 않으십니다. 원래 한국 교회는 이 모양이 아니었습니다. 초창기 한국 교회는 십자가와 은혜 외에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경회가 그것이었습니다. 예수 십자가라는 큰 틀 안에서 성경을 풀어주는 모임에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해남에서 평양까지 걸어왔습니다. 먹을 양식과 헌금할 쌀을 짊어지고, 아기를 등에 업고, 열흘씩 걸어서 말씀이 선포되는 곳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이틀이고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꼼짝 않고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선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운동이 들어오고, 기복주의와 신비주의가 결합하면서 교회가 변질되었습니다.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는 논리, 그것이 율법주의이고 기복주의이고 신비주의입니다. 이 셋은 본질적으로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 흐름이 비판받자 이번에는 성화론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러나 성화론도 목표는 같습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구원, 내 완성입니다.

"자기 부인을 하자"고 외치는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그 자기 부인을 하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자기입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건강한 기독교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부인하겠다는 또 다른 자아 확장의 시도입니다.

그렇다면 마귀란 무엇입니까? 빨간 옷을 입고 뿔이 달린 존재가 어딘가에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주여, 십자가를 지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해봅시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겠다는 생각, 그것이 마귀인 것입니다.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고, 물 위를 걸었습니다. 유다는 그 능력을 이용해 유대 독립을 이루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판 예수님이 그냥 죽으셨습니다. 계획이 어긋났습니다. 그러자 죄책감이 덮쳐왔습니다. 유다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기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귀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을 자기가 해결하겠다는 것이 율법주의이고 인본주의이며, 그것이 마귀의 본질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마귀란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을 들어도 그것을 인간의 논리로 해석하게 만드는 것, 은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 자기 행위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날마다 우리 안에 서게 되고 날마다 충돌이 일어납니다. 율법으로 자아를 확장하려는 나와, 그것을 죽이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동시에 "나는 날마다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날마다 살아나려는 나를 하나님이 날마다 죽이시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조금씩 부활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이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때 로마 병사들이 신 포도주를 우슬초에 묻혀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우슬초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물건이었습니다. 출애굽 전날 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를 때 쓰던 바로 그 도구였습니다. 죽음의 피를 바르는 도구였습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잔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신 그 진노의 잔과, 최후의 만찬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라"고 하신 은혜의 잔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은 이것입니다. 저주와 심판의 피가 우슬초에 묻혀 예수님께 드려졌고, 예수님이 그 잔을 받으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분이, 우리의 대표가 되어 저주의 잔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슬초가 우리에게 발려지는 것, 그것이 속죄요 대속입니다.

유월절 밤,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린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습니다. 그것이 구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너희가 똑바로 살지 않으면 그 피를 다시 닦아버리겠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광야에서 불평하면 다시 이집트로 돌려보낸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피는 이미 발려졌습니다. 완료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처절하게 실패한 순간에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고, 율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 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밤새 씨름하며 끝까지 이기려 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이라 부르셨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을 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를 반석이라 부르셨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그 반석이 예수라고 말합니다.

이름을 바꾸어 주실 때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하나였습니다.
"내가 하리라." 그것은 "너는 못 한다"는 선언입니다. 변해서 이름을 바꾸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처절하게 자기 한계를 드러낸 바로 그 순간에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탄생케 하고, 정의하고, 규정하신다는 뜻입니다. 계시록을 보면 성도의 이마에 전부 예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예수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이 사랑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랑이신 예수만을 사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로 보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안디옥에서 성도를 처음 '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자, 곧 "너 예수다"라는 선언입니다. 착한 사람 몇을 골라 예수라 불러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라 불러주시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 사람 안에 있는 예수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저기 예수가 있구나." 그 인식이 사랑입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교회에 헌금을 보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 지역에서 휴가를 내어 찾아와 예배드리고, 뒤통수만 보다 가면서도 그 감격을 안고 돌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목사가 아닙니다. 여기에 있는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왜 선악과는 금단의 열매였습니까?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이 왜 인간의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귀농한 젊은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지리산 자락 한 마을에 열 명이 모여 각자 열 평짜리 작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고만고만해서 비교할 것이 없었습니다. 다락방도 만들고, 텃밭도 가꾸고, 산자락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더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 꼭대기에 누군가 백 평짜리 집을 짓고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부터 열 평이 악이 되었습니다. 어제까지 아름다웠던 집이 갑자기 코딱지만 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비교 대상이 생기자마자 절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지옥이다. 선악 판단이 만들어내는 지옥입니다. 그러나 선악 판단의 능력이 없다면, 백 평이든 천 평이든,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됩니다. 선악 판단이 곧 율법주의이고 인본주의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과거에 묶이지 않습니다. 창세 전에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내려와 겪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가난, 부모에게 당한 상처, 돌이키고 싶은 과거. 그것들은 치유받아야 할 상처가 아니라, 세상의 실체와 인간의 본성과 예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하기 위해 허락된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뽑고, 파괴하고, 무너뜨려라. 그런 다음 새로 건설하라." 인본주의는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부수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안에서 마귀 같은 모습이 올라옵니다. 그럴 때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목숨까지 바쳐 진노의 잔을 받으실 수밖에 없었던 나였구나.' 그리고 때로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도 상상하지 못했던 용서와 인내와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그것은 내 안에 사시는 예수께서 잠깐 얼굴을 내미신 것입니다. 그 두 가지 모두를 붙잡지 마십시오.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냥 보십시오.

역사란 인간이 자기 흔적을 남기려는 시도의 집적입니다. 그 역사에서 인간이 배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진리는, 인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흔적을 남기려 하지 마십시오. 이름을 남기려 하지 마십시오. 더 깨끗한 삶을 만들어보겠다고 애쓰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이 말합니다. 우리는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그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슬며시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왕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