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히브리서 말씀 묵상

예수의 은혜와 율법주의의 경계 - 찢겨진 휘장 앞에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17.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19~25)

예루살렘 성전에는 아무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그 공간은 두꺼운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고, 일 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피를 들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외의 모든 사람에게 그 문은 사실상 닫혀 있었습니다.

성전의 구조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깊어지는 형태였습니다. 동쪽 바깥에서부터 안쪽 지성소로 갈수록 문은 점점 좁아졌습니다. 에스겔서의 기록에 따르면 문마다 네 척씩 좁아졌고, 마침내 지성소의 문은 거의 닫힌 것과 같았습니다. 반대로 바깥쪽, 동쪽으로 향할수록 문은 점점 넓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건축 설계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범죄한 인간은 언제나 동쪽으로 쫓겨났습니다.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이 동쪽으로 나갔고, 가인도 동쪽으로 떠났습니다. 동쪽으로 나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는 것, 저주의 현실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반대로 서쪽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께로의 귀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돌고 돌아 요단을 건너 동에서 서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도 그 귀환의 그림이었습니다.

그 성전의 구조 앞에 서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내가 곧 그 문이다."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의 문(a way)이 아니라 바로 그 문(THE way)입니다. 지성소로 향하는 그 좁고 좁은 문, 예수님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넓은 문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넓은 문을 세속적 탐욕이나 방종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전의 구조가 보여주는 넓은 문은 다른 것입니다. 지성소에서 멀어질수록 문은 넓어집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을 의지하는 자리에서 멀어질수록 길은 넓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적 행위, 율법적 성취, 타인의 눈에 보이는 헌신과 희생, 이런 것들을 의지할수록 그 길은 오히려 넓어집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넓은 문은 편한 길이 아닙니다. 가난하게 살고, 청렴하게 살고, 고난을 자처하는 삶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한다면, 그것이 넓은 문입니다. 인간은 칭찬이 보장된다면 얼마든지 고통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스럽다고 해서 좁은 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만을 의지하고, 인간의 눈에 보이는 어떤 행위도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는 것이 좁은 문입니다. 믿음 없이는 절대로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 비유가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칠 내용의 정체입니다.

첫 번째는 불의한 종의 비유입니다. 주인이 더디 올 것을 알고 제멋대로 사는 종이 등장합니다. 그는 주인이 기뻐할 일을 언젠가는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이 관심사가 아니라, 주인이 돌아올 그 '
'가 관심사였습니다.

두 번째는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흔히 이 비유를 설명할 때 기름을 성령으로 해석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미리 준비하라는 교훈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나중에 나가서 기름을 사왔습니다. 성령을 살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열 처녀가 모두 졸고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라고 해서 특별히 깨어 무언가를 한 것이 아닙니다. 차이는 단 하나, 기름의 유무였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신랑이 자기들이 예상한 시간에 올 것으로 착각했고, 그 시간에 맞춰 해야 할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의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올 것으로 착각했고, 나중에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둘 다 착각의 내용은 달랐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주인 자체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주인이 기뻐할 행위만 계산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세 번째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혼날까 봐 땅에 묻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무서운 존재로 곡해했고, 그 곡해한 이해 위에서 '
안전한 선택'을 했습니다. 반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에게서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음에도 장사를 했습니다. 장사는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장사를 했다는 것은 주인의 성품을 신뢰했다는 뜻입니다. 잃어버려도 주인이 자신을 벌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혜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세 비유가 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이 해야 할 행위만 붙들고 있는 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은 그 착각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줍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국내 최고의 암센터에서 의사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교회에서 들은 설교에 마음이 불탔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는 그 말이 그를 붙들었습니다. 부모님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의사 가운을 벗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갔고, 터키로 갔습니다. 십 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칭찬했습니다.
"훌륭하다, 헌신적이다." 그 칭찬이 그의 연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설교를 듣고 팀원들과 토론하다가 그는 갑자기 멈추었습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십 년 간 자신이 전한 예수가 누구인지, 그 순간 자신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였지만, 정작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 자신이 왜 그분을 사랑하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선동당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선동당한 사람들의 공통점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 율법주의에 대한 경고를 말해주는 교회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연료로 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의무감보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 일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그 연료는 언젠가 반드시 바닥납니다.

팔십 평생을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온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평생 들은 설교가 전부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끝났어요." 그 연세에, 그 입에서 그런 통찰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말기암 선고를 받은 분이었습니다.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모두가 이미 그 임박함을 알고 있는 상태로 장례식장을 찾아오셨습니다. 온몸의 내장이 칼날로 긁히는 것 같은 고통,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 숨 쉬는 것조차 싫은 상태, 평소에 절대 약한 소리를 하지 않던 분이 말끝마다
"너무 아파요"를 반복하셨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내가 이제 갈 때가 되니까 하는 말인데, 내 안에서 나오는 것 중에 죄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편안할 때는 자신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상상도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고통이 극에 달하자, 금방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나한테 왜 그러세요.' 그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까지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낱낱이 폭로하고 계시더라고요."

이 장면에서 '
자기부인'의 의미가 새로 열립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부인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참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나씩 끊어가는 그 과정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하나 죽여 가면서 또 다른 ''가 세워집니다. '이걸 안 하는 나', '십자가를 지는 나', '기특한 나'. 이를 악물고 살아내는 그 삶의 다른 편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아를 재건합니다.

임종 앞에 서신 그 권사님은 그것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평생을 신앙인으로 살았지만, 극한의 고통 앞에서 폭로된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
'였습니다. 견딜 만할 때는 누구든지 자신을 위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안에서 긁어버리시면, 본모습이 드러납니다.

자기부인이란, 내가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인하시고 예수로만 봐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자기부인이고, 십자가입니다.

어떤 이가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평생 교회를 다니고, 헌금을 드리고, 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 이만큼 했습니다. 상 주십시오." 그 순간 그의 눈은 예수를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까?

'
'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 상의 주인이 ''임을 드러냅니다. 내가 이룬 것, 내가 쌓은 것, 내가 받을 것,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어떻게 "하나님,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라고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와 함께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고백과, "상이 없는 곳은 가기 싫다"는 마음은 동시에 성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은 흙입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나온 존재입니다. 그 흙의 행위 중에 무엇이 그토록 가치 있어서 하나님 앞에 들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는 일 중에 진정으로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욱하면 터지고, 이기심이 올라오고, 원망이 쏟아지는 그 본모습을 아는 사람이라면, 상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색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짐으로 느껴집니다. 해야 하는 것, 지켜야 하는 의무, 그래서 사람들은 더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고, 선행을 쌓습니다. 그 등불은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등불을 끝까지 태울 기름이 없습니다.

한번 다르게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
율법과 선지자", 즉 성경 전체가 자신에 대해 기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빌립보서 2장의 예수님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목숨으로 사랑하신 분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웃의 개념 자체를 바꾸십니다. "너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너희를 이웃 삼아 사랑해야 너희가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한 그 ''는 예수님이십니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도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정말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셨군요. 그 사랑에 감사합니다"라고 대접해드리기를 바라시며, 먼저 우리를 대접하러 이 땅에 나그네로 오셨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나그네 셋을 대접한 장면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것을 "
믿음으로" 행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인 줄 알아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장면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비웃습니다. 하나님을 대접하면서도 비웃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오셨습니다.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대접이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나그네로 오셨을 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는 것으로 심판받았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나그네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덕적 교훈으로 읽으면, 우리는 영원히 짐만 집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나그네를 대접해야 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교 승려도 이슬람 신자도 그런 사랑을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전부라면,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것입니다. 그 사랑의 명령 안에서 주어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먼저 그 모든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을 받은 우리가, 그 사랑에 감응하여,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예수를 내어놓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멀리 떠나보낸 아이가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아버지는 아이에게 말합니다.
"기다려라. 반드시 돌아오겠다." 아이는 처음엔 아버지가 보고 싶어 매일 문 앞에 나가 기다립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변합니다.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리기보다,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칭찬받기 위한 행동들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집안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중심에 더 이상 아버지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 아이를 닮아 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있는 곳에 관심을 갖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도시의 날씨를 매일 확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그 나라가 진정으로 기다려지십니까? 그분이 정말 사랑스럽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 땅의 소유와 명성과 평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그분이 계신 곳에 아무런 설렘이 없다면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 길은 예수님이 자신의 몸인 휘장을 찢으심으로 열린 새롭고 살아있는 길입니다. 인간의 어떤 공로나 행위가 그 문을 연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의 찢겨진 몸, 그 피만이 우리의 통행증입니다.

그 보혈을 입고 하나님 앞에 가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내 아들아."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주인공 크리스천은 오랫동안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걸었습니다. 그 짐이 너무 무거워 허리가 굽고, 발걸음이 더뎠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 섰을 때, 그 짐이 저절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앞에 섰을 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대로 살면 됩니다. 착하게 살다가 욱하면 거기서 배우고, 그 죄를 하나님과 함께 미워하고, 그럼에도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보면서 다시 그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은혜 안에서의 삶입니다.

그 삶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그 십자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넓은 문이 아무리 화려하게 열려 있어도, 하나님이 붙들고 계신 영혼은 반드시 그 좁은 문, 찢겨진 휘장 앞으로 이끌려 옵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 십자가를 믿으십시오. 담력을 내어 성소로 나아가십시오. 그 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히브리서 10: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