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0:37~39, 11:1~3)
신학교를 갓 졸업한 어느 젊은 목사가 첫 부임지 교회에서 히브리서를 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열 장을 지나오는 동안 그는 매주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단번에 드려진 제물, 거저 주어진 구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장로가 찾아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그래도 뭔가 달랐던 사람들 아닌가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들 아닌지요?" 젊은 목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습니다. "장로님, 만약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1장부터 10장까지 쓴 내용 전체가 무의미해집니다."
히브리서는 하나의 주제를 향해 달려갑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의해 우리가 거저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진리를 열 장에 걸쳐 반복한 뒤에 갑자기 "그러나 그 중에 특별히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맥이 맞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은 모범으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예수에 의해 거저 구원받은 죄인들이었음을 증거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결단이나 의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선물로 읽어야 합니다.
10장 말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선언합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말씀을 붙들고 전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유무상통하며 살았습니다. 곧 오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잠시 잠깐'은 천국의 시간 개념입니다. 주님은 이미 오셨습니다. 승천하신 후 열흘 만에, 오순절에, 성령으로 오셨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몰랐을 뿐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은 언제 오시려나"라며 기다렸습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목사가 말하고 성경이 증언하지만, 만져지거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 전체를 뒤에서 바라볼 때, 어딘가에 이끌려 왔다는 느낌이 문득문득 찾아옵니다. 내가 선택한 것 같았는데, 돌아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누군가 이끌어 왔습니다. 그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온 피조세계를 장악하시는 그분이 특정한 삶을 어떤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끌어 가실 때, 우리는 그 사람을 가리켜 "그 안에 성령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면,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삭제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내가 자꾸 있음을 흉내 내고 추구하려 할 때 온갖 고통과 불안이 거기서 생겨납니다. 반면 점점 삭제되어 갈수록, 누가 욕을 하든 누명을 씌우든 복수할 기운조차 사라집니다. 희망이 남아 있는 사람, 자존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 펄떡입니다. 그러나 점점 죽어가는 사람은 그런 것에서 조용히 마음을 놓게 됩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히브리서 기자는 하박국의 말씀을 인용하여 1장부터 10장까지의 대주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경고를 덧붙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뒤로 물러간다는 것은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닌 행위로, 은혜가 아닌 공로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시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게 뒤로 물러가면 '침륜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물에 잠겨 죽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즉각 노아의 홍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우리는 흔히 이렇게 읽어왔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백이십 년 동안 신실하게 배를 지은 노아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덟 식구를 구원하시는 데 굳이 백이십 년이 필요하셨을까요? 홍수 날 통나무 하나 붙들게 하시면 안 됩니까?
노아의 방주 사건은 다른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이 세상 안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를 드러내는 역사적 모형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모두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을 짓고 사업을 벌이며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쌓아 올리던 시대에, 노아의 가족은 산꼭대기에서 배를 짓고 있었습니다.
처음 몇 년은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이웃들이,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면서 조롱으로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 년쯤 됐을 때, 아마 동네 사람들은 그 가족을 완전히 포기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들, 완전히 미쳤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한쪽은 승승장구했고 한쪽은 계속 죽어갔습니다. 세상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며 살았고, 노아의 가족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을 하며 그 가치를 조금씩 잃어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특별히 훌륭한 인격을 갖고 있어서 그 일을 감당했던 것일까요? 홍수 이후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벌거벗은 노아, 형제를 조롱한 함의 이야기가 바로 뒤에 나옵니다. 하나님 자신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잘나서 구원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내가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모형으로 쓰인 같은 악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홍수가 그들을 멸할 때까지 세상 사람들은 왜 자신들이 죽어야 하는지 몰랐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같이 훌륭한 사람이 왜 바보가 되어야 하고 왜 없어져야 하느냐"를 끝내 몰랐습니다. 노아의 가족만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종말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약속이 그들을 끌고 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시내산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먼저 언약하셨습니다. "이것을 지키면 살고 안 지키면 죽는다." 이스라엘은 즉시 대답했습니다. "지키겠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후손들, 이미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있음으로 여기는 이들이기에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즉시 피를 뿌리셨습니다. 이 약속을 어기는 자에게는 죽음이 임한다는 언약의 표였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계명이 채 내려오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법이 도착하기 전에 법은 이미 어겨져 있었습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돌판은 깨졌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는 저주로 끝납니다. 이것이 율법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돌판이 내려왔습니다. 모세라는 중보자가 막아서서 간구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두 번째 돌판이 법궤 안에 담겼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법 앞에 설 때마다 가져야 할 태도는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계명이 내려오기도 전에 이미 어긴 악인들인데 중보자에 의해 거저 산 자들이다." 법궤는 나중에 돌판만 남게 됩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는 사라집니다. 그 돌판, 그 말씀, 그 약속, 그것이 예수입니다.
애굽에서 사백 년을 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부족의 울타리를 벗어난 적 없던 시대에, 가본 적도 없는 그 땅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네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땅으로 이끌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택한 백성의 문설주에만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라는 역사 속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드러내야 했던 증거는 무엇이었습니까? 왜 자신들이 어린 양의 피로만 구원받을 수밖에 없었는가입니다. 가나안 땅은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하기에, 1세대 전부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가 폭로되어야 했습니다.
어느 유명한 사람이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을 밝혔습니다. 제주도 깊은 바다에 뛰어들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고결하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까지 자신의 자존심과 가치를 지키려는, 인간 안에 깊이 뿌리박힌 악의 한 형태입니다.
그리스도는 정반대로 사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손발에 못이 박혔습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가장 공개적인 장소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말합니다. 생각을 삭제하고, 움직임을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원래 이것이 너희의 모습이다." 없음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우리가 있음을 흉내 내는 것, 스스로 손발을 움직여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해내려는 시도 자체가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머리가 박히고 손발이 박히자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삽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형을 속이는 일조차 어머니 리브가의 손에 이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셨습니다. 반면 에서는 혼자서도 잘했습니다. 사냥하고 요리하고 스스로 해냈습니다. 그것이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나타나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뜻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통치에 이끌려 가는 삶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거절하고 예수를 위해 능욕 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재화보다 낫게 여겼다고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가 대단한 결단력으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사십 세의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 혈기 있게 싸우다가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하나님은 그 도망자를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죽이셨습니다. 그의 야망과 혈기를 하나하나 꺾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자리에 다른 뜻을 채우셨습니다.
이것이 여겨주심입니다. 대차대조표의 항목을 하나님이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자기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내 뜻이 이러한데 하나님은 다른 곳을 향해 이끄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의 뜻을 꺾어 당신의 뜻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이 계속 힘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부재하신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서 "저 사람 가짜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공을 들여 세운 고린도 교회에서, 다른 가르침이 들어오자마자 그 교회는 바울을 의심했습니다. 평생 감옥을 들락거리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배가 파선하고, 굶주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거의 혼자 남았습니다.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겉옷을 가져다오. 네게밖에 부탁할 수가 없어 미안하다. 다 떠났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계속 죽어가다가 나중에는 오직 한 고백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만이 나의 기쁨이고 그분만이 나의 주." 하나하나 다 떨어져 나가고 마침내 그 자리에 도달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끌고 가시는 방향입니다. 설교자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담임목사에게 묶이지 마십시오.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구축하겠다는 꿈에 너무 매달리지 마십시오. 우리 각자, 시베리아에 혼자 간다 해도 하나님은 그 사람과 동행하시며 반드시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가십니다.
짐바브웨의 오지에서 사역하던 한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큰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하고, 당뇨로 다리가 썩어들어가고, 마지막에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짐바브웨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사람도 없고, 전기도 없고, 물도 빗물을 받아 쓰고, 음식을 사러 가려면 며칠을 차로 달려야 했습니다. 할 일도 없었고, 왜 하나님이 자신을 거기 보내셨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카세트테이프 한 보따리와 건전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시간씩 자면서 한 달 동안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 보내신 이유를 이제 찾았습니다. 이제 아무 일 안 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살았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바라는 것들의 실상, 증거는 법정에서 증인이 제시하는 확실한 무언가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증거는 어떤 모양입니까? 화려하지 않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뜻과 다른 곳으로 계속 이끌려 가는 삶,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점점 손해 보는 것 같은 삶, 화려한 성취 대신 조용한 포기와 내려놓음이 쌓여가는 삶이 증거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자꾸 매달립니다. 헌금이 줄면 예배당이 어떻게 되나, 성가대가 없어지면 어떡하나, 교회가 작아지면 어떡하나, 그러나 예수만 있으면 됩니다. 말씀만 있으면 됩니다. 가나안 땅은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 개척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펼쳐지는 역사 속에서 그 편지로 사는 자들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네 후손들을 애굽에 보냈다가 사백 년 만에 데리고 나와 새 땅을 줄 것이며, 내가 쪼개져 십자가로 완성하겠다."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그 약속을 살아낸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나의 삶을 통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꾸 내가 개척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은 다른 종교가 됩니다. 예수와 은혜 이외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곳이 있다면 즉시 떠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 있어도 하나님이 끌고 가십니다. 짐바브웨 오지에서도, 필리핀 밀림에서도, 시베리아 설원에서도, 손발이 꽁꽁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기가 임합니다. 십자가에 박혀 죽어 있을 때 살아나셨던 그분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바라는 것을 향해,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그 이끌림 자체가 증거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서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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