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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말씀 묵상

죽었으나 오히려 말하느니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1.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브리서 11:3~4)

얼마 전 새벽, 어떤 사람이 잠이 쉬 오지 않아 뒤척이다 겨우 눈을 붙였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도 그는 같은 질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
생명이란 무엇인가?' 깨어 있을 때도 그 질문이었고, 잠든 뒤에도 그 질문이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혼자 어떤 논리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없음에 예수의 생명이 덮여야 비로소 생명이 된다.' 꿈에서 깨고 나니 별 대수로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깨어 있을 때도 나이고, 꿈속에서도 나인데, 그렇다면 지금 이 현실은 대체 무엇인가?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습니다. 팔랑팔랑 날아다니다 깨어 보니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지금 사람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성경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이미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고, 부르셨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과거형입니다. 이미 완료된 일입니다. 그 완료된 현실을 신학은 '
묵시'라고 부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영원한 현재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묵시 속에 완성된 하나님의 백성이 잠시 꾸고 있는 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인간이 어떤 존재일 수밖에 없는지를 경험하는, 일종의 악몽입니다. 베드로는 이 세상이 불 살라지기까지 한시적으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꿈은 결국 깨어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성인으로 창조된 것은 이 묵시의 완료성을 보여줍니다. 묵시에는 점진성이 없습니다. 자라남도, 성숙의 과정도, 결핍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번에 완성하시는 세계이기에, 처음부터 어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에덴 밖 역사 속으로 쫓겨나자 그때부터 썩어짐이 시작됩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며, 아이로 태어나 늙어 죽는 것, 그것이 역사의 문법입니다.

예수님도 어른으로 오셔서 바로 십자가에 달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묵시의 왕이 역사 속으로 오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작을 경험하셔야 했습니다.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시작하셔서,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시고, 겟세마네의 땀방울을 흘리시고, 골고다의 끝을 보신 뒤 다시 묵시로 올라가셨습니다. 부활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길을 걷습니다.

믿음 없는 자는 역사라는 꿈을 현실 그 자체로 봅니다. 꿈인 줄 모르고 꿈속에 완전히 갇혀 있습니다. 그 안에서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 하고, 더 오래 살려 합니다. 꿈이 화려할수록 깨어나기 싫어집니다. 마치 황홀한 꿈을 꾸다 오줌이 마려워 억지로 깬 사람이 다시 눈을 감고 그 꿈으로 돌아가려 애쓰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 꿈의 경계 너머를 봅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보이지 않는 묵시의 세계를 실상으로 붙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자는 나의 진짜 실체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완성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역사 속에서 내가 경험하는 과거와 미래의 불안은, 깨고 나면 사라질 꿈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이렇게 고백하게 만듭니다. "
이 꿈이 빨리 깨었으면 좋겠다." 악몽에 쫓기다 벌떡 일어나 "아, 꿈이었구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린 경험이 있습니까? 그 안도감, 그 해방감이 바로 성도가 죽음 앞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노감독 폴리캅은 화형대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빨리 불을 놓으라." 많은 사람이 그것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 용기라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팔십오 년을 날마다 죽으며 살아온 사람에게, 이제 확실히 깨어나게 해 준다는데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이 꿈을 10년, 20년 더 꿔야 한다는 것이 고통입니다. 그것이 순교의 본질입니다.

흔히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착한 아벨과 나쁜 가인의 대립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다른 곳을 가리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둘 다 죄인이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차이는 행위의 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에게 믿음을 주셨고, 그 믿음이 아벨로 하여금 '
옳은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믿음은 에베소서 2장이 말하듯 선물입니다. 아벨을 아벨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옳은 제사란 무엇입니까? 아벨이 드린 것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었습니다. 피 흘려 죽는 제물이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이 되어 죽는 것이 맞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그림자를 미리 본 것입니다. 그것이 옳은 제사의 핵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 맞다는 고백이 아벨의 제사입니다.

반면 가인의 제사는 땅의 소산이었습니다. 피 흘림이 없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경작하고 가꾼 것을 가져왔습니다. 그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행위와 수고로 하나님 앞에 서려 했습니다. 자기 꼬라지로, 자기 노력으로, 자기 종교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 한 것입니다. 그것이 틀린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리는 세상 밖에서가 아니라 언약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경계를 긋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의 아들들 사이에서 분리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 역사 전체의 패턴입니다. 가인과 아벨, 노아와 세상,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알곡과 가라지, 분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안에서 맞아 죽으셨습니다. 계시록의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하는 곳도 "
주께서 못 박히신 곳"이라 했습니다. 교회 안입니다.

2011년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가 세상을 뒤흔들었습니다. 광주의 한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수년에 걸쳐 자행된 성폭력을 고발한 작품이었습니다. 가해자들은 장애 아동들의 고통 위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검사와 변호사와 의사가 매수되었으며, 끝내 두 가해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들이 모두 교회 장로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인터넷은 들끓었습니다. "
저런 놈들은 죽여야 한다"는 댓글이 수만 개 달렸습니다.

그런데 공지영이 소설을 시작하는 방식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녀는 '
안개'로 시작합니다. 안개 속에 들어가면 사람은 무엇이든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들키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기는 순간,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안개 밖으로 나와서입니다. 바깥에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안개 속의 자기 모습을 감추려 합니다.

그렇다면 마귀에게 가장 단단히 붙들린 자는 누구입니까? 그 끔찍한 현실 앞에서 "
저런 악마들은 죽여야 한다"고 손가락질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은 안개 밖의 사람이라는 확신 속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그 확신이야말로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입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 중 누가 안개 밖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 소설을 읽으며 배워야 합니다. 저것이 바로 나의 실체라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나도 저 안개 속에서 다를 바 없다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같은 구조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거절당한 것에 분노했습니다. 자기 종교가 옳다고 믿었고, 그것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 폭력이 나왔습니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 가장 위험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언제나 아벨의 후손들을 교회 안에서 죽입니다. 율법주의가 은혜를 핍박합니다. 서머나 교회가 받은 고난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
자칭 유대인의 회에게" 맞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회를 "사탄의 회"라 부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은 죽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가인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그의 피가 땅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천 년이 지난 뒤에도 그의 믿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그가 옳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이 맞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이 말이 됩니다. 반면 가인은 살아남았습니다. 도시를 세우고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두려움과 폭력의 기억으로만 남았습니다. 역사는 아이러니합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자는 죽어 잊히고, 죽음을 받아들인 자는 살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떤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번듯한 건물을 짓고, 화려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대형 집회를 열고, 재력 있는 교인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잘 보이려 합니다. 자기 손의 수고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그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가인이 아벨에게 했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 칼을 휘두릅니다.

아벨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은 자기의 모습이 아니라 약속을 붙듭니다. 묵시 속에 완성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이 역사 속에서 맞아 죽는 것이 맞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조롱당하고, 멸시당하고, 교회 안에서 살해당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어도 그 믿음은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습니다. 진짜 당신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어, 묵시 속에 완성되어 있습니다. 이 역사 속에서 자라나고 성숙하고 발전해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완성된 존재입니다. 다만 지금 이 꿈이 빨리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과거로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이미 끝난 꿈의 장면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아직 시작되지 않은 꿈의 장면입니다. 당신의 걱정 대부분은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에서 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것들로부터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다. 묵시를 붙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옳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믿음으로 오히려 말합니다. 당신은 어떤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가인처럼, 자기 손의 수고로 하나님 앞에 서려 합니까? 아니면 아벨처럼, 죽는 것이 맞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까? 이 역사 속에서 맞아 죽으면서도, 죽어도 말하는 믿음, 그것이 아벨의 믿음이고, 우리가 부름받은 자리입니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브리서 11:4)